초겨울 문턱인데 아내는 테라스에 앉아 고들빼기나물을 다듬고 있다. 봄나물의 대명사인 씀바귀와 비슷한 나물이지만 지금도 텃밭어귀에 올라온 고들빼기를 정성껏 키우다가 가끔씩 캐내어 새콤 달콤 쌉쌀한 나물로 선 보이거나 장아찌를 담아 식탁에 올린다. 고들빼기는 씀바귀와 달리 잎 끝이 뾰족하고 뿌리가 단단하며 굵다. 따라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다듬는 작업이 매우
기차를 타고 혼자 군산을 다녀왔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카페에 앉을 수도 없어 기차에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역으로 향했다. 물과 카스테라를 크로스백에 넣고 자유로운 나의 두 손과 두 발을 위해 집 밖을 나가니 가을 햇볕도 환하니 지금이 내 세상이구나!여기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어 군산 기차길과 경찰서 앞을 지나 걸었다. 메밀 비빔면을 먹고 군산 시외버스터미널 상
“저 하늘에 별들이 모두 내 백성 같기만 하구나!” 이 말은 영화 에 나오는 세종의 대사이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며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 글을 배우던 유년에 엄마의 손이 나의 손등에 얹혀 또박또박 쓰며 벽에 붙이던 글자들이 하늘에 별로 떠서 박혀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주 휴일에는 겨울비가 온
막내 남동생의 집들이가 있었다. 두루두루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누나와 매형이 다 모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삶이 주는 어려움은 누구나 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생활을 이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본인의 몫이다. 피시방을 오랫동안 운영해온 동생은 영업 어려움으로 많은 손실을 보고 어렵게 가게를 처분했다.가게임대월세, 피시 사양
시계의 변혁이 가져다준 인류문명의 현주소가 도로 명 주소로 변해버린 현실처럼 번지수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역의 특색을 살린 도로 명을 부여하여 예전과 지금의 주소에 이질감이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지역의 역사나 특색과는 전혀 관계가 먼 동서로 남북로 등과 같은 다소 허무맹랑하기도 한 도로명의 정체는 상당히 허탈한 부분도 없지 않다. 이렇듯 우리
이모 면회를 가는 날이다. 옥색 레이스 양말과 복숭아 캔을 들고서 도착한 요양병원은 시내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산중턱에 있었다. 지금처럼 꽃들이 지천인 계절에 요양원 뜰은 꽃 한포기 없이 소나무만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굳은 듯 푸른빛이 슬프게 느껴졌다. 현관 밖으로 면회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사각으로 비닐막이 쳐진 작은 공간은 마치 저승과 이승의 대합실
흔히 너무 힘들면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비우고 내려놓는 가장 가벼운 말로 자기위안을 한다. 말은 말이고 주어진 일에 열심히 사는 건 변함이 없다. 여름비로 세상이 두 번째 난리를 겪는다. 질병과 자연의 과한 강수가 정신을 차릴 찰나를 주지 않는 사이 능소화, 상사화, 배롱나무 분홍꽃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을 쳐다보며 감탄을 할 겨를도 없이
지리 한 장맛비가 지긋지긋한 악마의 성격을 가진 요괴비로 변해가고 있다. 이젠 좀 그쳐도 될 텐데 하는 우리들의 소소한 희망을 밟아 버리기라도 할 듯이 막무가내로 쏟아지고 있다. 분명히 비는 우리인간과의 인연이 필수이기는 하나 지나친 경우 악연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 인연의 관계를 초월하여 여름의 적군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 맞으리라 생각 해 본다.
혼자 일 때에야 겨우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 타인의 침방울을 피하여 ‘숨’ 구멍을 가린다. 코와 입을 가리고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이제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말 차단 마스크! 외부를 차단하며 나와 너의 내면을 살리는 가면인가! 친구의 말보다 침방울을 먼저 보게 된다. 내게서 나간 침방울은 더 이상 튀어 흩어지지 않는다. 나간 침방울은 도로
친구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그녀 특유의 걸음걸이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머리는 땅을 보고, 엉덩이는 씰룩씰룩, 다리는 팔자걸음으로 이상하고 방정맞은 자세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안정적이고 당당한 걸음으로 변하여 날고 있었다. 서서 걷는 문체처럼 멀리서 그를 알아볼 때 얼굴보다는 걸음마이다.“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여류 작가의 문장이 눈에 들어
평택 통복 시장은 5일마다 장이 선다. 오일장은 닷새마다 서는 시장이다. 시장이란 개념을 잘 모른 채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평택으로 이사를 왔다.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눈감고 그릴 수 있는 선연한 평택역과 지금은 기억 속 연혁이 되어버린 통복시장 육교, 말하지 않아도 지난한 그림자들이 추억하면 할수록 생생하게 돌출한다. 시장은 나를 성장시킨 일기장과 같다
7월! 책장 옆 서재 사이에서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침묵 속 발효와 수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낡은 가방 7개를 들춰내면서 헤식은 먼지들을 툭 툭 털어 본다. 지금 내가 털고 있는 먼지는 이들이 이 구석진 안식처에 자리하고 수행에 들어가기 이전의 것들이 분명 하다. 그중에는 여러 번 먼지를 훑어내고 쓰러 내려도 잘 닦이지 않는 가방 몇 개가 드러난다.
한글 문서의 커서는 작게 반짝이며 내게 무엇을 할 거냐고 깜박이며 묻는다. 해가 떠오르면 일터로 가는 통근 버스에 나를 싣고 하루 길을 간다.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들판 끝에 있어 여름날 변하는 시골길의 풍경이 보인다. 어느새 옥수수 긴 자루에 갈색 수염이 나오고 논두렁에 콩잎들이 벼와 함께 자란다. 누가 사는지 이층집 담장 벽에는 한창 담쟁이 잎이 햇
애호박 몇 개를 얻었다. 양파와 가지, 고추가 덤으로 왔다. 식감을 느끼도록 굵게 채를 썰어 고추와 양파를 넣고 들기름을 둘러 호박전을 부쳤다. 채반에 부쳐 놓으니 전에 관한 어릴 적 기억이 돋아난다. 경상도에서는 전을 적이라 불렀다. 제사가 있는 날이거나 명절전날이면 정지(부엌의 경상도 방언)에서 무쇠솥뚜껑을 뒤집어 엄마는 전을 부치셨다. 고소한 기름 냄
모든 만남의 씨앗은 마음의 꽃이 맺어준 결실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그 만남 속의 에너지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과 관심이 얽히고 어우러져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고 열량 부산물 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만남을 경험하며, 또한 돌아서는 미덕도 배워 간다. 어쩌면 이 사회는 헤어짐을 전제로 만들어진 만남의 서곡들로 장식 되어 있는
화요일 아침에 나와 안성 인지사거리에서 서운산 가는 버스를 시골사람들과 기다린다. 시골버스의 여유와 빈 공간을 맞으며 정오의 햇볕은 뜨겁게 느리게 흘러 정지될 것 같았다. 곧 끝나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며 마스크를 자연스레 쓴 행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이상하다.이 와중에 세상 뉴스는 또 잔인하게 전한다. 여기저기서 계부와 친모가 어린 아이를 학대하
하늘이 찍은 낙관이 있다. 반짝이는 작은 은별이 콕콕 박힌 밤하늘을 보면서 푸른 풀잎의 냄새와 물소리를 듣는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제목의 코넬 울리치 책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오싹한 공포를 기묘한 긴장감과 죽음을 예언하는 예언자와 “검은, 어두움 혹은 우울한”이야기가 마법처럼 조여지는 궁금 유발 가득한 전개가 흥미롭다. 밤은 어둠으로 사물
한 봄 송화 가루로 세상을 뒤 덮은 소나무의 위세가 때 이른 장마에 기세가 꺾인 듯하다. 흔히 산에 서식하는 소나무는 한줄기로 성장해 높이 오른 후 여러 가지를 나누며 성장 하지만, 관상용 정원수인 반송(盤松)은 어려서부터 여러 줄기로 성장하며 둥근 모양으로 성장하며 그 아름다운 자태가 남다르다. 따라서 그 둥근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봄이면 새로이 자라 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덕동산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네 의자와 목련 숲 환한 녹색이 나를 태워주니 앉은 곳이 바로 자연카페가 되었다. 동녘에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걸 천천히 바라보니 얼마만의 휴식인지, 가까이 뻐꾸기 울음과 오월 새들의 나는 소리는 정신을 맑힌다. 코로나19로 나의 일터는 발주량이 반으로 줄었다. 연차를 당겨서 삼일 째 쉬면서 시간부자가 된
오월의 과수원은 배 열매솎기에 분주하다. 배꽃이 수정되고 꽃이 떨어지면 곧 착과가 되는데 한 꼭지에 10개에서 10개가 넘게 조그마한 열매가 맺힌다. 그 열매들 중에 한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솎아낸다. 그 마음에 정한 하나를 위해 농부의 손에 선택되지 않은 것들은 가차 없이 땅에 떨어진다. 지난 주말 아침에 과수원 언니로부터 일손이 모자라 배 밭에 나오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