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그녀 특유의 걸음걸이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머리는 땅을 보고, 엉덩이는 씰룩씰룩, 다리는 팔자걸음으로 이상하고 방정맞은 자세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안정적이고 당당한 걸음으로 변하여 날고 있었다.

 
서서 걷는 문체처럼 멀리서 그를 알아볼 때 얼굴보다는 걸음마이다.“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여류 작가의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살이에 마음의 자락들이 놀라거나, 작은 깨달음을 겪고 나면 걸음걸이가 신중해진다. 시행착오를 저지를 때마다 움직임은 수정을 하면서 나아가는데,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수록 자신이 원하는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머리 어깨 등 팔 다리는 하나의 몸통으로 연결되어있어 몸을 놀리는 태도로 사람의 문체가 정해진다. 다람쥐나 호랑이의 걸음걸이는 개성이 없다. 걷는 속도와 발 끝에 닿은 세밀한 각도로 사람은 자신의 개별적 이미지를 기른다. 
 
걸음걸이는 얼굴표정보다도 더한 무의식적인 정보를 적나라하게 내보낸다. 한 사람의 모양새가 태도로 얼굴에서도 드러나지만 몸이 나타내는 인상을 눈은 단박에 흡수한다. 
 
걷는 모양에는 여러 가지 형용사가 있다. 허둥지둥 비틀비틀 뒤뚱뒤뚱 성큼성큼 위풍당당 자분자분, 뒤를 돌아보며 걷는군요, 발을 똑똑 들어 걷지 못하고 질질끌며 걷는군요, 힘없이 흔들흔들 걷는군요, 두리번거리며 걷는군요, 기탄없이 걷는군요, 고개를 치켜들고요, 고개를 숙이고요.
 
아, 팔자걸음도 있어요. 바로 나예요, 일자로 알맞은 속도로 걸어요, 걸을 때의 기분이 바로 보여요, 유전이군요, 나만의 호흡으로 걸어요.
 
건강과 생각과 걸음걸이는 하나이다. 잘못된 것을 고쳐가는 걸음걸이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아름다우면서 이상하고 독특하면서 평범한 동물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내 속을 말없이 보여주며 살고 있다. 
 
여자에서 어머니가 될 때, 사건이 일어나 시들 때, 장미꽃이 필 때마다 나의 걸음걸이는 신중해졌다. 땅을 두발로 똑바로 디디면 서게 된다. 걸음마가 멈추어지면 홀로서기는 끝나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며 살아야한다. 
 
나는 세상사에 서툰 걸음걸이지만 내 몸의 주인으로서 걸음은 더디게라도 진화하는 중이다. 
 
새 신발을 신고 장미꽃 사이를 훨훨 날자!
새들에게 날개가 있듯이 나의 날개는 걸음걷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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