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이 드디어 효공의 마음에 드는 부국강병의 방안을 내놓으면서 진나라에 등용되었다. 효공은 상앙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으나 반대하는 여론을 생각해 그 정책을 바로 실시하지는 않았다.상앙은 한번 더 효공에게 자신의 방책을 건의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끝나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 성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
황하를 중심으로 중원 지역의 많은 제후국들이 서로 갈등과 전쟁을 일으켜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동안 서쪽 지역에서 조용히 한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훗날 춘추전국시기를 마무리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가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제후들은 진나라를 서쪽 오랑캐로 여기고 무시했으며 회맹의
오자서가 죽으면서 자신의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놓으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고 오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에도 간신의 이간질을 이기지 못한 부차는 그를 무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월나라의 뇌물을 받았던 재상 백비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자신의 군주에게 올바른 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와신상담의 이야기는 오나라와 월나라간의 전쟁에서 만들어진다. 와신상담은 절치부심과 비슷한 내용으로 해석되는데 모두 원한을 풀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합려는 월나라의 정복에 실패한 후 상처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고 이때 아들 부차(夫差)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장마철 비소식이 있어서일까. 유난히도 회색빛 무채색이던 지난 19일 오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 154-16번지에 위치한 다믈농장을 방문했다. 다믈농장은 치료부터 치유까지 가능한 전국 유일무이한 특용작물(신체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식물) 농장으로, 전국 최초로 스테비아 식용화를 이뤄내고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6차 산업 인증을 받았다.이날 필자는 농장 한편에
춘추전국 시기에 많은 나라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재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최근에 식객이라고 하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세력이 있는 집안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그 주인을 도와주는 인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식객을 많이 거느린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과 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가장 많은 식객
우리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지만 공동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고사성어 중에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오월은 오나라와 월나라를 지칭하며 중국의 양자강 하류 지역에 자리를 잡았던 제후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양자강 남쪽 지역으로 지금의 강소성과 절강성에 위치하고 춘추전국 시기에는 중원에서 상당히 멀리 떨
초나라의 장왕이 맹주가 되어 중원에서 세력을 떨친 후 그가 사망하자 초나라의 국력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초장왕의 아들인 공왕도 오래 살지 못했고 그 아들인 강왕 역시 단명했다.강왕은 자신의 아들인 겹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숙부인 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위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영왕이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에 세조가 권력을 찬탈하려
주나라가 비록 세력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천자(天子)라는 명맥이 살아 있어 왕(王)이라는 호칭과 유명무실한 주군의 역할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주위의 제후국들은 제후 혹은 공(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한편 중원의 남쪽에 새롭게 초나라가 등장했다. 초나라의 위치는 중국의 장강 남쪽에 있어 주류 문화가 아닌 독자적인 남쪽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원에서
오늘날 국제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세력은 현실주의이다. 현실주의는 국가가 중심이 되고 국가의 경제력, 군사력 등을 중심으로 국가간의 위계가 정해진다. 그래서 사실 국제정치는 무정부적이고 힘(power)이 곧 정의(justice)가 되는 상황을 자주 볼 수 있다. 21세기에도 200개가 넘는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국제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에서 활동하
제나라의 환공이 춘추시기에 맹주로 등장했을 때 그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사후 시신도 수습을 못할만큼 비참한 상태에 빠졌고 자식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골육상쟁을 벌이다 나라가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역사는 권력의 성쇠를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경고를 하고 있으나 권력의 독배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오류를 반복하고 있
춘추 시기 초기 전국을 호령했던 맹주인 제나라의 환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소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환공도 그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환공 재위 38년에 주나라의 왕이었던 양왕의 동생이 이민족과 결탁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환공은 관중을 보내 주나라를 도와 이민족을 몰아냈
제나라의 환공은 초기에 국력을 강화하고 관중의 말을 따라 선정을 베풀었기에 제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후국들이 그를 따랐고 자연스럽게 그의 위치가 올라갈 수 있었다. 환공이 제후가 된지 7년이 되었을 때 제후들은 환공을 맹주로 받들어 그가 춘추시대의 초기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그는 북방의 이민족이 연나라를 공격해오자 군대를 파견하여 연나라를 보호해
-“내 시는‘빛이다.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 -“내가 하는 활동이 누군가에겐 힘이 되기를” - 시/에세이 주간 베스트셀러 27위 기록 “코로나로 힘들었던 세상 사람들, 내 글이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면 도움이 될까?” 첫 만남에서 송도아 작가는 자신이 시(詩)를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지는 지난 17일, 공도읍에 위치한 송도아 작가 초대
주나라는 여왕과 유왕이 정사를 게을리하고 자신의 탐욕과 여색을 밝히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원래의 태자였던 평왕이었다.그는 서쪽의 견융 등 이민족들의 공격에 불안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읍을 동쪽의 낙읍이란 곳으로 천도했다. 이때가 기원전 770년이었고 이때부터 기원전 476년 전국(戰國)시기가 시작될 때까지 약 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루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했다.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물며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국가들이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나라가 망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는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상나라의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은 자신들의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가장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는 지금의 산동성 동쪽 지역을 주었고 나라 이름을 제(薺)라고 하였는데 바로 산동성의 수도인 제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또 자신의 동생인 주공에게는 곡부를 주었고 나라 이름을 노(魯)라고 하였다. 이후 공자의 고향이 바로 곡부였고 지금도 공자와 관련된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에게는 뛰어난 지략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윤으로 손자병법에서도 등장한다. 손무의 손자병법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지지 않는다”라는 병법이 있다. 여기서 손자는 상나라가 흥기한 것은 이윤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윤은 탕왕을 만난 이후 그를 도와 적국의 동태를 파악하여 적
요순을 이어 받은 우왕은 세금을 면제하고 치수를 통해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른바 복잡한 규제를 제거하고 행정을 간단히 하여 업무의 편의와 효율성을 높여 주위의 부족들이 스스로 찾아와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사기에 따르면 우왕은 약 45년간 왕위에 있었고 근검 절약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문제가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왕조를 묘사해놓은 본기 중에서 오제 본기는 신화의 시기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용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 역시 이 부분도 역사적 고증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임을 은근히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하(夏)왕조부터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로 믿고 자신의 사기를 쓴 것 같다. 그 내용이 하본기(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