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이 드디어 효공의 마음에 드는 부국강병의 방안을 내놓으면서 진나라에 등용되었다. 효공은 상앙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으나 반대하는 여론을 생각해 그 정책을 바로 실시하지는 않았다.

상앙은 한번 더 효공에게 자신의 방책을 건의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끝나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 성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일을 계획하고 시작할 때는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고 그 결과만 누리게 하면 된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상앙의 그럴듯한 이 말속에는 정책결정자의 잘못된 오만과 독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은 살피지 못했다. 

효공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는 상앙에게 솔깃하였으나 다른 신하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감룡이라는 신하는 “법을 바꾸지 않고 훌륭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라고 반박했다. 상앙은 감룡의 말에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법을 따릅니다” 라고 반박하였다. 

이번에는 두지라고 하는 신하가 “법은 백배의 효용이 없다면 바꾸어선 안됩니다. 예로부터의 방법과 예를 따르면 착오가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상앙과 신하들간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국 효공은 상앙의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진나라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상앙은 엄격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법의 내용도 무시무시했다. 먼저 백성들을 5인과 10인으로 나누어 백성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게 했으며 한 집이 잘못하면 같이 벌을 받는 연좌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범죄를 알거나 발견하였을 때 고발하지 않으면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고발한 자에게는 상을 주도록 했다. 그의 법은 한 집에 성인 남자가 두명이 있는데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배로 물도록 했다. 군대에서 공을 세운자는 공의 크기에 따라 벼슬을 주고, 만약 귀족이라도 군대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귀족의 특권을 박탈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이렇게 엄격한 법제도를 만들었으나 바로 시행하지 않고 그 법이 정말로 실행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우선 한가지 시험을 하였다. 상앙은 나무 한 그루를 남문 옆에 세워두고 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에 옮겨 심으면 10량을 주겠다고 포고문을 붙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믿지 않자, 다시 상금을 50량으로 늘렸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진짜로 나무를 옮겨 심었고 그에게 50량을 주었다. 그 시험이 끝난 후 상앙은 드디어 자신의 법을 선포하고 백성들에게 따르도록 하였다. 

당시에 태자가 이 법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자, 태자를 직접 벌주지는 못해도 태자 주변의 시종들에게 형벌을 가했다. 이후 법의 엄격함을 깨달은 백성들은 그 법을 따르기 시작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국가의 국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을 가진 상앙은 더욱 엄격한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했다. 진나라는 점차 더 강해졌고 효공은 춘추시대의 맹주가 되었다. 공자인 건이란 사람이 법률을 어기자 이번에는 공자의 코를 베어버렸다. 이렇게 법률 만능주의에 빠진 상앙은 그후에도 10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특권을 빼앗긴 귀족과 왕의 친인척들은 상앙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를 지켜주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친인척들과 귀족들이 상앙이 반역을 꾀한다고 올가미를 씌웠다. 이에 놀란 상앙은 바로 피신하여 도망가다가 함곡관이란 곳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여관에 묵으려고 했으나 그 주인은 상앙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지인은 증명서가 없으면 안된다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위나라로 도망쳤으나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진나라 군대에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법률 만능주의가 장점도 있지만 그 엄격함이 과할 때는 화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상앙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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