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는 여왕과 유왕이 정사를 게을리하고 자신의 탐욕과 여색을 밝히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원래의 태자였던 평왕이었다.

그는 서쪽의 견융 등 이민족들의 공격에 불안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읍을 동쪽의 낙읍이란 곳으로 천도했다. 

이때가 기원전 770년이었고 이때부터 기원전 476년 전국(戰國)시기가 시작될 때까지 약 295년의 기간을 춘추시대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춘추라고 부른 것은 공자(孔子)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 노나라의 사관들이 각국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을 시간별로 기록했는데 1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기록했고 그 기록을 춘추라고 불렀다. 

후에 공자가 그 기록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편집하여 ‘춘추’를 완성했다. 이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책이며 당시의 상황들을 상세히 정리하고 있어 사마천도 이를 바탕으로 사기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동쪽으로 이전한 주나라는 명맥만 유지할 뿐 제후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당시 주나라의 통치범위는 겨우 6백리에 불과하였고 제후국들은 주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게되었다. 

중심이 되었던 주나라의 쇠퇴는 당시 제후국들의 분열과 혼돈을 초래했다. 주나라 왕실이 강했을 때는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왕을 천자로 모시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구심점이 사라지자 제후국들은 각자 도생을 목표로 서로간에 대립하기 시작했다. 

무정부 상태의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강한 국가는 작은 국가를 병합하였고 서로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통계를 살펴보면 36명의 제후들이 신하 혹은 상대방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52개의 제후국들이 멸망했으며 크고 작은 전쟁이 약 480여차례 벌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지속은 서로간에 공포심을 자극했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략과 전술등이 총동원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백가 사상의 대부분이 이때 완성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에 대한 갈망이 지배했던 시기임을 의미한다. 

춘추시대가 진행되면서 수백개의 국가들이 경쟁을 하면서 점차 140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그중에서도 몇 개의 힘있는 국가들이 서로 협의를 통해 패자(覇者), 즉 가장 중심되는 국가를 선발하여 무질서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시도하였다. 

물론 이 패권을 장악한 제후국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그 위치가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었다. 오늘날 이야기하는 현실주의 정치의 전형이 바로 춘추시기에 이미 다 등장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시기 최초의 패권국가는 산동성 치박이라는 곳에 수도를 정한 제나라였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무왕에게서 받은 영지에 세운 제후국이었다. 그 위치가 바다를 끼고 있고 물산도 풍부하여 국력이 가장 강하였다.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당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관중을 참모로 얻게 되어 국가의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관직과 직책을 정비하고 전국을 21개의 향으로 구분하였다. 상공업을 장려하고 농민들이 농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었다. 이렇게 수년이 지난 후에 제나라의 국력은 더욱 강해졌고 북쪽 지역에서 가장 힘센 국가가 되었다. 

제나라는 담나라와 주변의 제후국들을 차례로 정복했고 노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환공은 당시 무력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에 대해 신의를 지켰기 때문에 많은 제후국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제나라를 통치하는 환공을 패자(覇者)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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