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시기 초기 전국을 호령했던 맹주인 제나라의 환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소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환공도 그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환공 재위 38년에 주나라의 왕이었던 양왕의 동생이 이민족과 결탁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환공은 관중을 보내 주나라를 도와 이민족을 몰아냈다. 주나라는 이에 관중에게 정일품의 관직인 상경을 추서하려고 하였다. 관중은 자신이 단순히 왕실을 모시는 신하에 불과하여 받을 수 없다고 즉석에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에게 예우를 하려고 하자 하경이라는 좀 더 낮은 관직의 예우는 받아들였다. 

관중의 이러한 행위는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 가지도록 하였고 그가 건재한 이상 감히 제나라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3년이 지나 환공이 41년이 되던 해에 관중이 병에 걸렸다. 

환공은 관중을 찾아가 만약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향후 누구를 재상으로 삼으면 좋은가에 대해 상의했다. 환공은 역아(易牙)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가 물었다. 관중은 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 군주에게 아첨한 사람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그를 재상으로 삼으면 안된다고 했다. 

역아라는 인물은 원래 환공의 요리사였으나 환공이 사람의 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다고 하자 자신의 아들을 죽여 국물을 만들어 환공에게 먹였다고 하니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반대하였고 환공은 역아를 믿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개방(開方)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관중은 개방은 위나라의 관리이면서도 군주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친족을 버린 사람이니 데려다 쓰면 안됩니다고 극구 반대했다. 

  마지막으로 수조를 쓰면 어떨까라고 묻자 그는 스스로 거세하여 군주에게 아부한 사람입니다. 그를 쓰면 안됩니다고 또 반대하였다. 

  그러나 관중이 죽은 후 환공은 관중의 충고를 무시하고 이 세 사람을 측근으로 임명했다. 관중의 예측대로 이들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환공의 다섯명의 자식들도 관중이 죽고나자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환공 역시 재위 43년이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마자 역아는 수조와 함께 군인들을 데리고 궁궐에 난입하여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공자인 무궤를 제후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환공이 죽자마자 권력 투쟁이 전개되어 환공의 시체는 침실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의 시신에서 구더기가 생겨 문 밖으로 기어나왔다고 한다. 

그해 겨울에 권력투쟁이 끝난 후에야 환공의 시신이 수습되고 매장을 하였는데 그가 사망한지 67일이 되는 날이었다. 수십년간 천하를 호령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환공은 자신의 교만으로 관중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다가 결국은 죽어서도 제대로 대우를 못받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명이 넘는 아들 중에서 다섯이 권력 투쟁을 했고 권력을 잡았던 무궤도 3개월 만에 죽었다. 송나라의 양공은 자신에게 피신해 있던 제나라의 태자인 소를 앞세워 다른 제후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무궤를 죽인 것이었다. 

처음에는 제나라가 어느 정도 막아 낼 수 있었으나 명분을 잃은 제나라의 4명의 공자들은 패배했고 태자인 소가 제나라의 군주인 효공이 되었다. 송나라가 군대를 파견한 것은 관중이 죽기 전에 태자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환공은 겉으로만 자신의 말을 따르는 사람과 충성스러운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교만에 빠져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교만함이 자신과 주변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환공의 이야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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