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순을 이어 받은 우왕은 세금을 면제하고 치수를 통해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른바 복잡한 규제를 제거하고 행정을 간단히 하여 업무의 편의와 효율성을 높여 주위의 부족들이 스스로 찾아와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사기에 따르면 우왕은 약 45년간 왕위에 있었고 근검 절약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왕의 뒤를 이어 백익이라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었으나 정치를 잘하지 못하자 제후들이 우왕의 아들인 계를 왕위에 앉혔다. 중국에서 최초의 권력 세습이 이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계가 사망한 후 다시 그의 아들 태강이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그 또한 죽고 남동생인 중강이 뒤를 이었다. 

사기에는 계가 사망했을 때 하나라의 운명이 다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하나라의 14대 왕인 공갑은 덕이 부족하고 군사력에만 의지하여 제후들과 백성들을 억압하자 점차 민심이 하나라를 떠나고 있었다.  하나라를 이어 받은 국가는 은나라 혹은 상나라로 불리는데 은이란 명칭은 상나라의 수도였고 실제로 그 부족의 이름은 상이라고 한다. 신화속의 중국 최초의 왕조였던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치고 성탕이라는 사람이 상나라를 건국하였다. 

원래 상나라도 신화속에 있었으나 중국 하남성에서 갑골문이 발굴되면서 역사에 편입되었다. 갑골문은 1898년 중국의 금석학자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 확인되었다. 그가 병에 걸려 약재를 사려고 한의원에 들렸는데 그가 사온 약재중에 ‘용골’이라는 뼈 조각이 있었다. 그 뼈에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추적하기 시작했다. 결국 단순한 뼈조각이 아니라 중국에 실제로 상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후 상나라는 중국의 역사를 시작하는 왕조가 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성탕은 8번이나 도읍을 옮겼고 하나라의 걸왕과 제후들을 정벌하여 상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식언(食言)이란 말을 쓰는데 탕왕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탕왕이 하나라를 공격할 때 백성들에게 자신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공을 세운자에게는 포상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그는 “나를 믿어라. 나는 내가 한 말을 먹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 한가지 단어는 ‘도탄(塗炭)’이란 말이다.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과 국가를 어렵게 할 때 지금도 ‘도탄에 빠졌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라에서 항복한 재상이 탕왕에게 “하나라는 덕을 잃어 백성들이 진흙탕과 숯불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숯불에 빠져있다는 말이 바로 ‘도탄’이란 글자이다. 

상나라가 만들어졌을 때 주변에도 여러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비록 국가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부족들이 분산되어서 각자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역사적 고증에서 밝혀지고 있다. 

역사에서 탕왕의 어진 정치에 주변의 40개 부족이 찾아왔다고 하는 내용을 보면 상나라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중원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가 놀라운 것은 그의 기록과 이후 발견된 갑골문의 기록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상나라는 기원전 1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세력을 동쪽을 향해서 확대했는데 오히려 서쪽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상나라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점차 국력이 기울던 상나라는 마지막 왕인 주(紂)에 와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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