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왕조를 묘사해놓은 본기 중에서 오제 본기는 신화의 시기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용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 역시 이 부분도 역사적 고증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임을 은근히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하(夏)왕조부터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로 믿고 자신의 사기를 쓴 것 같다. 그 내용이 하본기(夏本紀)이다. 하본기는 황제에서 곤이라는 왕까지의 족보에서 시작하여 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제1대 우왕에서 하나라가 멸망하는 걸왕까지의 중국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하나라를 개국한 우왕(禹王)은 삼황오제의 자손으로 설명되는데 마치 우리의 시조가 단군에서 시작된 것과 유사하다.

삼국유사에서 보면 단군이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고 환웅의 아들로 고조선을 세우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서도 우왕은 황제에서 시작된 전욱의 직계 후손으로 기록하여 신화와 역사의 시기를 연결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자신들의 역사의 시작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에 대한 대답이 가능해진다. 

  중국 문명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사기의 하본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 시작이 치수(治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하는 약 5,500킬로미터의 긴 강이다. 청해서 티벳고원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오면서 사막의 모래가 쌓인 황토 고원을 만나게 된다. 황토고원에 막힌 황하는 북쪽으로 물줄기를 틀게되고 다시 남하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발해만으로 빠져나간다. 이때 황토고원의 토사들을 같이 가지고 오면서 물의 색은 황토색으로 변해있고 하류로 가면서 곳곳에 이 토사들이 쌓여 비옥한 토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물줄기가 워낙 자주 변화되어 농민들에게는 비옥한 토지도 있지만 동시에 비가 많이 오면 재앙이기도 했다.

사기에서는 요 임금부터 시작하는데 곤이라는 관리에게 치수를 명령했으나 9년이 걸려도 홍수를 막지 못해 백성들이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원성이 하늘에 닿았다. 

  요 임금은 치수를 위해 새로운 인물을 등용했는데 바로 순이라는 사람이었다. 요 임금은 순이 치수를 잘 관리하고 백성들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훗날 자신의 왕의 자리를 순에게 물려주었다.이 시기에는 중국은 왕의 자리가 세습이 아닌 능력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선양이라는 권력계승 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 임금은 자신의 후계자 역시 신하들에게 요 임금의 업적을 잘 이어갈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고 그 추천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백우(伯禹)라고 하는 인물이었다. 백우는 치수에 실패해 처형된 곤의 아들이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 논어와 다양한 글에서 중국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이상적인 시대를 요순시기라고 하고 지금도 그 말이 전해져 오는데 바로 하나라가 시작되기 전 단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하던 백우는 임금의 명을 더 이상 거역하지 못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그를 성실하고 근면하며 자애로운 지도자로 묘사했다. 백우는 자신의 아버지가 못이룬 치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13년이나 집에 가지 않고 집 앞을 지나도 집에 들리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또한 먹고 입는 것도 절약하고 그 남은 돈은 모두 치수에 쏟아 부었다.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보를 쌓아 홍수에 대비하고 식량이 남는 곳의 것은 부족한 곳에 분배하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노력했다고 하여 지역간에 골고루 잘 살도록 했다고 한다. 

  하본기에서 다루어지는 요순과 우임금의 치세는 신화와 현실이 중첩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치수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치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발전은 왕권이 세습화되면서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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