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가 죽으면서 자신의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놓으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고 오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에도 간신의 이간질을 이기지 못한 부차는 그를 무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월나라의 뇌물을 받았던 재상 백비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자신의 군주에게 올바른 건의를 하지 않았다. 이에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월나라의 왕 구천은 범려에게 오나라를 공격하고 싶다고 하였다. 구천은 가장 두려워했던 오자서가 없어진 지금이 공격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범려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하였다. 

다음해 오나라의 부차는 자신이 맹주로서 북쪽의 황지라는 곳에서 제후들과 회맹을 가지려고 하였고 자신의 정예부대를 대동했다. 이때 오나라의 수도에는 태자와 노약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구천이 범려에게 지금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범려는 지금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천은 그의 말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수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파죽지세로 오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태자를 죽였다. 월나라가 공격했다는 소식에 부차는 놀랐지만 다른 제후국들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도성으로 돌아왔고 월나라에 화친을 청했다. 

부차의 불길함은 오자서의 죽음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회맹을 할 때 다른 제후국들이 오나라의 말을 순순히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기고만장했던 부차가 자신이 주나라 왕실보다 더 높다고 함부로 말하자 진나라의 정공은 이에 질세라 부차를 몰아붙였다. 결국 진나라를 더 자극 할 수 없었던 부차는 병사를 데리고 오나라로 귀국했다. 

오나라 상황은 더 참혹했는데 자신의 아들인 태자는 살해되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오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후 수년이 지나 월나라의 구천은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당시 오나라의 군대는 제나라와 진나라와도 전쟁을 하고 있어 이를 물리칠 마땅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월나라의 공격에 오나라는 3년을 버텼으나 결국 도성을 버리고 고소산으로 도망쳤다. 오왕 부차는 자신의 신하인 공손웅을 사신으로 보냈다. 

공손웅은 부차를 대신하여 상의를 벗고 구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화친을 청했다. 그 내용은 이전에 월나라의 구천이 부차 앞에서 한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구천의 신하가 될 것이며, 자신이 이전에 회계산에서 용서해주었듯이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본 월나라의 구천은 마음이 약해져서 그 화친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범려가 나서서 이를 말렸다. 범려는 구천에게 “회계산에서 월나라가 패한 것은 오나라에게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나라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번에 하늘이 월나라에게 오나라를 주었는데 받지 못한다면 월나라는 기회를 상실할 것입니다”라고 간언하였다. 

  범려는 이어서 와신상담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되며 오늘을 위해 22년을 기다렸다는 것을 상기 시켰다. 구천은 범려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음이 약해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범려는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경비병들을 불러 오나라 사절을 쫓아냈다. 사신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고 구천이 나중에 부차에게 섬에서 살도록 해주겠다고 다시 전갈을 보내왔다. 그러나 부차는 결국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는 죽기전에 “내가 죽어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천으로 가릴 것을 청했다.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오나라와 월나라의 역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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