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바뀌면서 건강관리를 더 잘, 철저히 해야 하는 때인 환절기.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지면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이 더 쉬워진다. 우리는 그에 따라 더 철저히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 환절기 건강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환절기에 먹으면 좋은 음식인 ‘배’와 ‘생강을 먹는다. 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
서로 힘을 겨루던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시간이 가면서 그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서쪽에 위치했던 진(秦)은 법가사상을 기초로 부국강병에 힘쓰면서 국력을 키웠고, 그 힘을 바탕으로 동진(東進)을 시작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도도한 물결처럼 밀려오는 진나라의 세력을 한치도 안되는 혀로 이를 막아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소진(蘇秦)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위, 조, 한으로 분리된 기원전 45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춘추시기가 끝나고 살아남은 일곱 개의 국가들은 마지막 통일을 향해 달음질 치고 있었다. 특히 전쟁의 형태가 춘추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전국시기 이전에는 전쟁과 전투의 목적이 성과 땅을 점령하고 이후 항복하면 일정의 배상금을 받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수도를
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했던 춘추시기는 점차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해 명멸을 거듭하면서 살아남은 몇 개의 국가로 줄어들게 된다. 주나라 말기인 기원전 475년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반적으로 전국시기라고 일컫는다. 아직 몇 개의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였으나 거의 영향력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 개의 강력한 국가들에 의
춘추시기 말엽이 되자 중국의 역사가 미치는 영역이 더 넓어지게 된다. 이전에 중국의 남부는 오랑캐의 땅으로 치부되었으나 초나라 이후 양자강 하류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트남을 한자로 쓰면 월남인데 바로 월나라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각각 뛰어난 재상들이 있어 자웅을 겨루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힘이 센 장군이었던 항우(項羽)의 별명이 초패왕(楚覇王)이었는데, 항우의 집안은 원래 진시황에게 통일되기 이전 초나라의 관리였기 때문에 유방(劉邦)과 싸울 때 초패왕이라고 불렸다. 초나라는 중국에서 가장 긴 장강(양자강)의 중류에서 시작되었고 춘추시기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춘추시기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황하(黃河) 중류를
국제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냉혹한 이익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의 춘추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많은 국가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었고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그 중 대표적으로 힘을 가지고 지배적인 위치에 놓였던 나
춘추시기에 몇 개의 패권(覇權)들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진(晋)나라의 문공(文公)이었다. 원래의 성씨는 희씨(姬氏)로 주나라의 왕실과 같은 혈통이었다. 그는 진헌공과 고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친구사귀기를 좋아했고 17세에 그를 평생 동안 따르게 되는 친구이자 부하들이 있었다. 아버지인 진
상(商)나라의 왕들이 폭정을 일삼으면서 점차 인심을 잃어가고 있을 때이다. 당시 상나라의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던 주나라의 서백이 하루는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사냥을 가기전 점을 보았는데 점괘에 “이번 사냥에서 얻는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당신을 보좌할 인물이다”라고 나왔다. 실제로 사냥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수라는 곳에
천자(天子)를 중심에 두고 천하의 개념을 도입했던 주나라는 친족과 공신에게 영토를 분할해주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서양의 봉건제도는 계약을 매개체로 했기 때문에 그 계약은 상호간에 중지하거나 취소할 수 있었다. 반면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서양과는 다르게 혈연과 신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군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나라 이외의 국가들은 왕이란
천하(天下)라는 개념은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친인척과 공신들에게 나눠 제후로 임명하면서 만들어졌다. 천하의 중심에 주나라가 있고 이를 다스리는 자가 바로 천자(天子)로서 중화사상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주나라 왕실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부패와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제후국들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충성심이 약화되기
지금의 서안(西安)이 있는 섬서성은 중국의 역대 왕조의 도읍지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지도를 펼쳐보면 하나라와 은나라가 황하유역에서 시작하였는데, 모두 하남성에 속해있다. 하남성의 서쪽 지역이 섬서성이고 중국의 서부 대개발의 출발지로 고대에는 중국의 서쪽 변방지역이었다. 섬서성의 서쪽은 감숙성이고 남쪽은 사천성으로 중국의 고대역사에서 보면 중
역사의 발견은 종종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1899년 청나라 말기의 어떤 한의사가 거북이 껍질을 약재로 사용하고자 구매하였는데 그 껍질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 순간 전설과 신화로 전해져 오던 상나라가 역사의 시기로 편입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발견으로 지금 중국의 하남성 안양(安陽)이 그 도읍지였음을 밝혀냈고 수많은 갑골문과
황하문명을 둘러싼 전설과 역사 이야기는 문명의 시작을 알려준다. 그 이야기는 공자가 중국의 고대에 가장 모범으로 삼는 요순(堯舜)시대에서 시작한다. 당시 요왕은 곤(鯀)이라는 부하를 시켜 황하의 치수를 명령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수를 막아내지 못하자 순을 시켜 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결국 곤은 치수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했졌
일명 양자강으로도 불리는 장강(長江)과 황하(黃河)가 중국의 대표적인 강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큰 물줄기를 강으로, 작은 물줄기를 하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북방에서는 하(河)라고 하고 남쪽에서는 강(江)이라고 호칭한다. 그래서 남쪽 지역에는 장강이고 북쪽에는 황하라고 하여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같은 의미이다. 중국의 문명을 황하문명이라고도
태초의 인류에 대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끊임없이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20년간의 연구와 관찰을 통해 ‘개미’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졌으며 그는 이 책에서 1억만 년이 넘게 생존해온 개미들을 통해 인간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신’이라는 장편 소설에서 세계의 다양한 종교와 신화를 융합해 인간을 넘어서는 신을 찾기 위한 여행
한동안 학계에서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관심이 집중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변되던 미국과 소련의 총체적 경쟁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지만 또 문명 간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대립의 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G2(Great of Two)라는 이름으로 경쟁과 협력을 지속해왔으나 이제
미중 무역 전쟁은 아직 안개 속에 빠져 있고 그 불확실성은 국제경제와 한국의 경제에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와중에 시진핑은 80년 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大長征)을 기념하면서 중국은 새로운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손문(쑨원)의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합쳐졌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손문이 간암으로 죽은 후 장개석이 국민당을 차지하면
1840년 6월 영국군이 청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오랫동안 영국과 유럽은 중국의 차와 도자기에 열광하였고 이는 영국과 중국간의 무역 불균형을 초래했다. 무역적자가 계속 쌓여가자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 사이에 아편은 쉽게 퍼져나갔으며 지금까지의 무역구조는 역전되어 중국의 은이 대량으로 영국
한국의 홍남기 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9년 4월 25일에서 27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서 한국의 신북방 및 신남방정책과 일대일로와의 연계 협력 방안에 대해 발언하였다. 중국의 시진핑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정책은 중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유럽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경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