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문명을 둘러싼 전설과 역사 이야기는 문명의 시작을 알려준다. 그 이야기는 공자가 중국의 고대에 가장 모범으로 삼는 요순(堯舜)시대에서 시작한다. 당시 요왕은 곤(鯀)이라는 부하를 시켜 황하의 치수를 명령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수를 막아내지 못하자 순을 시켜 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결국 곤은 치수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했졌다. 
 
요순시대에는 왕위 계승이 부자세습이 아니라 선양제(禪讓制)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양제는 아들이 아니라 주위에서 훌륭한 후보자를 뽑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제도였다. 선양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하나라 이전의 황하문명에서는 여러 부족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국가가 만들어질 만큼의 규모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순시대에 와서 곤의 아들인 우(禹)를 시켜 다시 황하의 범람을 막는 치수를 맡겼다. 우는 아버지와는 달리 황하의 치수를 잘 시행하여 그 치적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후 순왕은 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권을 넘겨 받은 우는 당시의 부족을 잘 경영하였고 드디어 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중국의 최초의 왕조로 일컬어지는 하(夏)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황하 유역의 하나라와 그 민족을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중국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의 기원이 된다. 
 
우왕에서 시작된 하나라는 청동기의 초기단계로 보인다. 하나라는 14대 왕에 이르고 그 기간은 약 470년 정도 유지되었다고 학계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다. 왕조로서의 모습을 띠게 된 이유는 왕위의 부자세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부족의 형태에서는 서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우왕 이후에는 그의 아들이 왕위를 세습했기 때문이다. 왕위의 세습은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세습은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하나라는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문헌이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의 많은 역사서에서 하나를 중국 왕조의 시작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황하의 치수를 중심으로 부족이 왕조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발굴된 상왕조에 멸망했다는 것을 보면 하왕조가 역사와 전설의 혼재속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우왕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라는 포악하고 사치스러운 걸(桀)왕에 이르러 멸망하게 된다. 걸왕은 산동성쪽을 공격했는데 이때 그 지역사람들이 매희(妹喜)라는 미녀를 진상하였다. 매희는 걸왕과 매일 술을 마셨는데 당시 각 지역에서 잡아들인 미녀들과 난잡한 생활을 이어갔다. 
 
중국에는 4대 미녀와 함께 4대 악녀가 있다. 바로 하나라를 멸망시킨 매희, 은나라를 멸망시킨 달기, 주나라를 멸망시킨 포사와 춘추전국 시대에 진(晋)나라를 멸망시킨 여희가 있다. 즉 매희는 중국 최초의 악녀이며 동시에 경국지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희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하자 걸왕은 환심을 사기 위해 국고를 탕진하면서까지 비단을 찢도록 했다. 심지어는 매일 술을 잔에 부어 마시는 것이 귀찮게 여겨지자 아예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술을 가득 담도록 하였다. 그리고 3천명의 궁녀와 같이 술의 연못에 들어가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결국 선대에 이룩했던 치수와 백성에게 베풀던 덕은 사라지고 폭정과 세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백성들은 이러한 왕을 몰아내고자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걸왕은 자신의 왕국에 있던 부족들을 소집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에게 붙잡혀 유폐되었다가 병과 기아로 죽고 말았으며 이로서 하나라도 멸망하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폭군과 최초의 악녀가 모두 하나라에서 만들어졌다. 황하문명을 이룩했던 첫 번째 왕조는 폭군과 악녀의 손에 몰락하게 되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바로 상나라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백성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폭정을 일삼으면 반드시 그 백성들에 의해 멸망한다는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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