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위, 조, 한으로 분리된 기원전 45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춘추시기가 끝나고 살아남은 일곱 개의 국가들은 마지막 통일을 향해 달음질 치고 있었다. 특히 전쟁의 형태가 춘추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전국시기 이전에는 전쟁과 전투의 목적이 성과 땅을 점령하고 이후 항복하면 일정의 배상금을 받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수도를 함락시켜도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기도 하였다. 이때의 전쟁은 중원에서 누가 패권을 차지하는가가 주된 목적이었고 패권이 성립되면 다른 국가들은 이를 따르고 패권을 장악한 제후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전국시기에는 영토를 확대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고 전쟁의 기술과 무기가 발전함에 따라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영토 확장의 최종 목표는 중원에서 자신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적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권모술수와 책략이 더 교묘해지고 정교해졌다. 전국시기에 살았던 맹자(孟子)는 이 상황을 “산과 들에 시신이 가득하고 성에도 시신이 가득하다”고 묘사하면서 당시에 벌어졌던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의 상실을 개탄했다. 
 
이제 전쟁에서의 패배는 바로 멸망과 죽음으로 이르는 상황이 되자 모든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력을 군사력에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전쟁은 총력전이 되었다. 이전에는 전쟁이 나면 지배계급과 귀족계급들을 중심으로 군대가 조직되었으나 전국시대에는 대규모로 농민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냈다. 또한 전투의 형식도 넓은 평원에서 서로 대치하면서 전투를 하였으나 전국시기에는 유인, 매복 등 다양하고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여 무조건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병력의 규모도 진나라와 초나라는 이미 100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잔인한 시대에 제자백가들은 춘추시기에 이어서 다양한 자신들의 학설들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학설로는 겸애설을 주장했던 묵자(BC 408-376)가 있다. 그는 국가간의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가 사랑하고 도와주는 겸애(兼愛)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현자(賢者)가 왕을 맡아야 하며 왕위세습제를 반대했다. 
 
당시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상앙(商岟 BC 390-338)을 빼놓을 수가 없다. 진(秦)나라 효공은 부국강병을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구현령(求賢令)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상앙이 등용되어 진나라의 제도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백성들을 조직하여 서로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었는데 일종의 연좌제였다. 둘째로는 농업을 중심으로 사농공상을 함께 발전시켜나갔다. 농업에서는 농민이 자신에게 부여된 토지이외의 땅을 개간할 경우 그 토지를 사고 팔 수 있는 자유를 줌으로서 농업생산량을 급격히 증대시켰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토지 매매와 사유제를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상앙이 추진한 중요한 제도중의 또 하나는 권력의 집중화였다. 이전에는 한 지역의 토착세력이 그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중앙에서 직접 지방의 관리를 파견하여 권력을 집중시켜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그리고 상앙의 이 제도는 훗날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시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상앙의 제도변화로 진나라는 짧은 시간안에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고 이후 나머지 6개국을 통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상앙의 패권적 제도에 반대하는 사상가는 바로 맹자(BC372-289)였다. 그는 공자 사후 150년 이후에 활약했다. 그의 주장은 덕(德)과 인(仁)을 기초로 하는 왕도정치였다. 그래서 군주는 백성을 귀하게 생각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야만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강조했다. 
 
 전쟁의 잔혹성과 제자백가들의 다양한 학설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시간은 점차 통일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최초의 중국 통일이 이제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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