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발견은 종종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1899년 청나라 말기의 어떤 한의사가 거북이 껍질을 약재로 사용하고자 구매하였는데 그 껍질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 순간 전설과 신화로 전해져 오던 상나라가 역사의 시기로 편입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발견으로 지금 중국의 하남성 안양(安陽)이 그 도읍지였음을 밝혀냈고 수많은 갑골문과 청동, 그리고 옥(玉)이 발견되었다. 

 
상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하나라의 통치를 받는 부족의 형태로 오랫동안 지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탕(湯)왕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웠으니 이때가 기원전 1600년으로 이후 주나라에 멸망한 기원전 1046년까지 약 550년간 유지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상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현존하는 문자기록을 통해 확실한 역사시기로 편입된 것과 동시에 중국의 문자, 즉 한자(漢字)가 초기에 사물을 보고 만들어진 상형문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의 상형문자는 갑골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문자는 모두 4천자가 넘으며 그중 25%는 해독이 가능하다. 갑골문이란 소의 넓쩍다리 뼈와 거북이와 자라의 등뼈에 새겨진 글자를 의미한다. 갑은 거북이와 자라의 등뼈, 골은 소나 동물의 넓쩍다리 뼈이다. 상나라 시기에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하기 위해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은 갑골에 글자를 새기고 불을 가열하여 여기서 나오는 문형을 해석하여 길흉을 점쳤다. 상나라 시기에는 모든 만물에는 신령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당시 제사의 대상은 만물이었지만 대표적인 것이 하늘 신, 땅의 신, 그리고 조상신이었다. 그중 높은 권위를 가진 대상을 제(帝)라고 여겼는데, 지금의 각 종교의 하나님의 위치에 있었다. 그의 능력은 자연과 기후를 통제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하며,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능의 신으로 생각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한 제기(祭器)들은 청동기로 만들어졌으며, 청동문화가 크게 번성하게 되어 제사만이 아니라 농업에도 사용됨으로서 생산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청동문화의 발전은 생산력을 증가시켰고 국력이 신장됨에 따라 그 영토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황하의 중하류까지 많은 부족들을 자신의 영향력하에 귀속시킴으로서 하남성, 하북성, 안휘성과 산동성, 산서성도 상나라의 영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에서 성행했던 제사는 중국에게 또 다른 문화를 만들게 된다. 바로 술(酒)과 음악(音樂)이었다. 하늘과 신령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 술을 빼놓을 수 없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음악이 필요했다. 지금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술잔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악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국의 다양한 문화들, 음악, 술문화, 종교, 법률 등이 상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500여년의 태평성대도 주(紂)에 와서 멸망하게 된다. 역시 달기(妲己)라고 하는 여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이때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난을 일으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주나라이다. 
 
상나라가 멸망하자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의(仁義)에 맞지 않다고 하면서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다가 굶어 죽었다. 훗날 공자는 이들을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했지만, 폭정에 저항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에 반대하는 것이 정말 충절이었는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와 관련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도 상왕조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상왕조의 귀족이었던 기자가 주나라에 반대하고 한반도로 넘어와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로 기자동래설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였고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조선에서도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그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서에 단군조선과 그 이후를 기자조선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거의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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