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기에 몇 개의 패권(覇權)들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진(晋)나라의 문공(文公)이었다. 원래의 성씨는 희씨(姬氏)로 주나라의 왕실과 같은 혈통이었다. 

 
그는 진헌공과 고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친구사귀기를 좋아했고 17세에 그를 평생 동안 따르게 되는 친구이자 부하들이 있었다. 아버지인 진헌공이 왕이 되었으나 헌공의 애첩인 여희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태자였던 신생을 왕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누명을 씌어 자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공과 동생 이오도 죽이려고 하자 해외로 망명하였다. 
 
해외에 망명했을 때 문공의 나이는 이미 43살이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계속 쿠데타가 발생했고 동생 이오가 진나라로 돌아가 제후가 되었으니 진의 혜공이었다. 권력을 잡은 혜공은 형의 인기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하고 자객을 파견하였고 문공은 당시 가장 강성했던 제후국인 제나라로 가서 몸을 의탁하게 된다. 
 
제나라에서는 문공을 후대하였으며 새롭게 결혼을 하여 편안한 생활을 보내게 된다. 제나라에서 5년을 보낸 후 부하들과 부인은 문공의 뜻을 펼치게 하기 위해 술을 먹인 후에 제나라를 떠났다. 
제나라를 떠나 조(曹)나라에 도착한 문공 일행은 환대를 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약한 이유로 문전박대를 받은 문공의 내면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고 성공에 대한 굳은 의지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조나라에서 송(宋)나라로 왔지만 송양왕은 금방 초나라 군대에게 패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공을 잘 대접하면서 자신이 힘이 없어 더 도와주지 못하니 좀 더 큰 나라로 가라고 권고했다. 다시 길을 나선 문공은 정(鄭)나라를 방문하였다. 당시 많은 나라들이 주나라 왕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혈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나라의 제후가 푸대접을 하자 한 신하가 잘 대접하든지 아니면 죽여야 후환이 없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문공이 다음에 도착한 나라는 초(楚)나라였다. 당시에는 큰 나라였으나 주문공을 제후의 예에 맞추어 대접해주었다. 당시 초나라의 성왕이 문왕에게 당신이 진나라로 돌아가서 제후가 되면 어떻게 보답해줄 것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문왕은 당신과 전쟁터에서 만난다면 내가 3일이 걸리는 거리를 양보하겠다고 하였다. 초나라의 성왕은 문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초나라는 진(晋)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 있는 친(진:秦)나라로 가도록 조언을 해주었다. 
 
친(秦)나라는 병사를 문왕에게 군대를 내주고 진나라로 돌아가 제후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왕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진나라의 문무백관이 그를 환영했고 드디어 진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그가 고국을 떠나 방랑길을 떠난지 19년만의 일이었다. 
 
제후에 오른 진문공은 조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초나라에 공격을 당하던 송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다시 군대를 보내 도와주었다. 이때 진문공은 자신이 유랑하던 시기 약속했던 대로 초나라에 3일간의 거리만큼 후퇴를 해주기도 하였다. 진문공은 즉위한지 6년만에 제나라, 송나라, 노나라, 채나라 등과 모인 장소에서 패권을 인정받았고 이로서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사람의 발전에 있어서 고난과 역경은 자신을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성장하고 단련시켜주기도 한다. 바로 진문공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진문공이 유랑시절 배고플 때 자신의 허벅지살을 떼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훗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주문공을 떠나 어머니와 산속에서 살고 나오지 않자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다. 그럼에도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는데 진문왕이 애통해하면서 매년 그날을 기념하여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밥을 먹었다. 바로 한식(寒食)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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