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서안(西安)이 있는 섬서성은 중국의 역대 왕조의 도읍지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지도를 펼쳐보면 하나라와 은나라가 황하유역에서 시작하였는데, 모두 하남성에 속해있다. 하남성의 서쪽 지역이 섬서성이고 중국의 서부 대개발의 출발지로 고대에는 중국의 서쪽 변방지역이었다.  

섬서성의 서쪽은 감숙성이고 남쪽은 사천성으로 중국의 고대역사에서 보면  중원에서 보면 이민족의 거주지였다. 은나라 시기에 가장 서쪽에서 시작된 주나라는 초기에는 하나의 부족에 지나지 않았고 유목민족인 융(戎)족에게 밀려 섬서성쪽으로 이주하였다. 주나라를 세운 부족은 희(姬)씨 성을 가지고 있는데 글자에서 보면 아마 모계사회의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姓氏)라는 글자에서 성(姓)은 그 부족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씨(氏)는 출신 지역을 대표하였다. 예를 들어, 박(朴)이라는 것은 부족을 나타내고 이후 어느 지역에서 거주할 경우 밀양 박씨라고 하였다. 점차 인구가 증가되면서 성(姓)과 씨(氏)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성(姓)이란 말도 ‘여성이 출산하다’라는 의미로 고대 중국 사회의 기본적인 집단 형태는 모계사회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은나라 주변에서 부족국가를 이루고 있던 주나라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록 나라 혹은 국가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지만 당시 이들의 규모는 씨족이나 부족이 거주하는 정도로 읍(邑)이라 불렸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국가를 읍제국가(邑制國家)라고 하고 진정한 영토국가 형태를 띠는 것은 최소한 전국시기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약 7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중국 역대왕조 중 가장 오랜 기간 존속되었다. 그 시기동안 크게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되는데, 서주 시기의 도읍은 서안의 서쪽이었고 동주 시기의 도읍은 지금의 낙양(洛陽)이었다. 원래 서쪽에서 발흥한 주는 서쪽의 유목민족인 견융(犬戎)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동주가 되었다. 
 
주나라 이후 중국 역사에서 만국(萬國)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주나라의 왕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친척이나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봉제(分封制) 또는 봉건제(封建制)를 실시하면서 그 중심에 주나라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만국은 국가가 아니라 읍(邑)에 해당하는 영지(領地)이고 훗날 춘추시대(春秋)를 여는 바탕이 되었다. 
 
봉건제를 실시한 주나라의 왕(王)은 자신을 천자(天子)로 호칭했고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은 제후(諸侯)라고 불렀다. 천자는 바로 하늘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유럽의 왕권신수설과도 일맥상통한다. 만국의 중심인 주나라와 천자의 개념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의 대외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첫째는 문명과 야만의 기준이 정립되었다. 중국이 아닌 기타 지역은 모두 야만으로 간주하여 동이(東夷), 북적(北狄), 남만(南蠻), 서융(西戎)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둘째는 중국과 야만의 개념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만들었다. 즉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 중화사상은 지금도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이웃국가들과 갈등을 빚는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주나라는 또한 농경지가 확대되고 점차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 다양한 법제를 만들었는데 농업의 경우 정전제(井田制)가 도입되었다. 정(井)자를 보면 9개의 칸이 만들어지는데 가운데 농지는 공동경작을 통해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고 나머지는 사전(私田)이었다. 농경사회의 세수제도가 완성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주나라에서만 지방분권을 실시하였고 진나라 이후에는 중국의 통치 방식은 줄곧 중앙집권을 유지하게 된다. 비록 1912년 황제제도가 무너지고 1949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하지만 실질적 통치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는 중앙집권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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