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天子)를 중심에 두고 천하의 개념을 도입했던 주나라는 친족과 공신에게 영토를 분할해주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서양의 봉건제도는 계약을 매개체로 했기 때문에 그 계약은 상호간에 중지하거나 취소할 수 있었다. 반면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서양과는 다르게 혈연과 신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군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나라 이외의 국가들은 왕이란 말을 쓰지 못했고 제후라고 불렀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주나라 이후에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나라가 최초로 통일 중국을 완성한 후에는 모든 권력이 한 곳, 즉 황제에게 집중되는 중앙집권제도가 수천년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것은 봉건제도가 가지는 통치의 비효율성을 발견하였고 동시에 권력을 집중하고자 하는 중앙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금도 중국공산당 지배체제의 공고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역사적 경험에서 지방자치나 민주주의를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춘추시기(春秋時期)는 주나라가 수도를 서안 부근에서 낙양으로 옮긴 이후의 시기부터 시작된다. 그 시기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76년까지이다. 이 혼란의 시기를 춘추시기라고 부르게 된 배경은 당시 제후국이었던 노(魯)나라의 사관(史官)이 당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역사서인 ‘춘추’를 쓰면서 편찬했다. 공자는 이 책을 다시 정리하고 편집했고 훗날 중국 유교의 경전중의 하나가 되었다. 
 
춘추시기 동안 국가의 수는 학자간에 견해가 다르나 기본적으로 14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기간 동안 36명의 군주가 신하나 적들에게 피살되었고 52개의 제후국들이 멸망했으며 크고 작은 전쟁이 모두 480여차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춘추시기는 중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대분열이 있었던 시기였고 가장 혼란에 빠졌던 시기 중의 하나였다. 
 
주나라 왕실의 쇠락과 중앙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자 제후국들은 더 이상 천자의 말을 듣지 않고 혼란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주인이 없는 천하의 혼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제후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높은 세금과 부역을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또한 끊이지 않는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져들게 했고 인구의 격감과 가정을 파괴했다.   
 
경제적으로도 이전의 정전제도를 통해 유지되었던 세금제도가 붕괴되었고, 논밭의 소유가 국가가 아닌 제후나 호족 손에 넘어가면서 생산력을 장악하게 되어 농민들은 농노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천하의 대란은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하는 많은 사상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바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출현이다. 기록에 따르면 약 189개의 학파들이 난립했다고 하나 실제로 유명한 것은 수십개가 있었으며 그중 유명한 것은 12개이다. 그 12개는 법가(法家), 도가(道家), 유가(儒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소설가(小說家), 종횡가(縱橫家 ), 병가(兵家), 의가(醫家)를 말한다. 
 
주나라의 쇠락은 더 이상 하늘의 뜻이라는 천도(天道)를 따르지 않게 되었으며 제후들은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의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인가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상가들을 가리켜 제자(諸子)라고 불렀고, 그 학파를 백가(百家)라고 했다. 예를 들어, 공자(孔子)는 제자의 한 사람이고, 유교(儒敎)는 백가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이 제자백가들은 각지를 떠돌면서 자신의 정치와 사상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중국의 사상과 철학이 대부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주의 몰락과 이에 따른 봉건제도의 해체는 천하의 주인을 잃어버렸고 중국이 안정되기까지 다시 수백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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