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기 말엽이 되자 중국의 역사가 미치는 영역이 더 넓어지게 된다. 이전에 중국의 남부는 오랑캐의 땅으로 치부되었으나 초나라 이후 양자강 하류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트남을 한자로 쓰면 월남인데 바로 월나라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각각 뛰어난 재상들이 있어 자웅을 겨루었다. 오나라의 왕 합려는 자신의 신하로 오자서(伍子胥)를 두고 있었다. 그는 원래 초나라 관리 오사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모함에 빠져 옥에 갇혔다. 당시 초나라 왕은 두 아들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으나 오자서는 돌아가면 죽을 것이라 판단하고 돌아가지 않고 오나라로 망명했다.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는 외교를 담당하면서 당시의 대부이던 백비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손자병법을 쓴 손무가 만류하여 다음해에 초나라의 수도는 남겨두었다가 힘을 쌓아 다음해에 초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그 영토를 넓혔다.  
 
이후 3년이 지나자 오나라는 다시 오자서와 손무를 시켜 초나라를 공격하였고 수도를 함락시켰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이 죽은 지 16년만의 일이다. 그는 이미 죽은 초나라 왕의 무덤을 파헤쳐 300차례가 넘도록 채찍질을 하였다. 중국에 “군자는 원수를 갚는데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君子報仇十年不晩)”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은 것이었다. 
 
오나라가 북쪽의 초나라와 싸우는 동안 그 옆의 월나라가 세력을 키웠다. 당시 월나라의 왕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하였고 전투에서 오나라 왕 합려는 화살에 부상을 당했다. 이후 부상으로 죽게되자 아들 부차에게 나의 원수는 월나라의 구천이니 반드시 원한을 갚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다시 전쟁을 하게 되는 데, 월나라의 왕 구천은 크게 패했고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월나라의 재상 범려는 구천에게 거짓 항복을 하도록 하였고 승리에 도취한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오나라에서 돌아온 구천은 늘 말린 쓸개를 먹고 치욕을 잊지 않았는데,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이다. 
 
월나라와 전쟁에서 이긴 후 자만에 빠진 부차는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 오자서가 왕에게 계속 반대되는 의견을 내자 결국 오자서를 죽이게 된다. 오자서는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뽑아서 동문에 걸어라 내가 죽어서 월나라 군사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라는 저주를 남겼다. 
 
오자서가 죽은 후 2년만에 실제로 월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 오나라와 월나라는 최후의 결전을 하게 되었다. 오나라는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많은 병력들을 외지에 두고 있어 국력이 약해져 있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3년동안 전쟁을 치루었는데 이때 양국의 관계가 워낙 악화되어 서로가 원수처럼 여겼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오월동주(吳越同舟)’이다.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완전히 패하고 부차는 구천에게 항복과 화친을 청했다. 월나라의 재상 범려는 만약에 이번에 오나라를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간청했다. 월나라의 구천이 망설이고 있을 때 부차는 칼로 자신을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죽어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천으로 덮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오나라와 월나라의 오랜 전쟁은 월나라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한편 월나라의 구천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왔던 범려는 전쟁이 끝나자 조용히 궁을 나와 성과 이름을 바꾸고 거처를 바꾸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 
 
범려는 군주란 필요할 때는 자신을 옆에 두지만 언제든지 토사구팽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장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크게 성공하여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장사의 신’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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