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天下)라는 개념은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친인척과 공신들에게 나눠 제후로 임명하면서 만들어졌다. 천하의 중심에 주나라가 있고 이를 다스리는 자가 바로 천자(天子)로서 중화사상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주나라 왕실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부패와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제후국들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충성심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봉건제도의 약점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자신에게 영토를 주고 제후로 삼았으니 충성을 다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혈연관계도 희박해져가고 충성심도 약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도 모른다. 
 
주나라 유왕(幽王)때의 일이다. 주변에 있던 약소국인 포(褒)나라를 공격하였고 포나라는 포사(褒姒)라는 미녀를 주나라에 헌상하고 화해를 청했다. 포사와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나라 말년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우리는 포국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에 점을 쳐보니 용을 죽이거나 쫓아내거나 남겨두어도 모두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 점괘는 용의 침을 보관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여 상자 안에 보관하였고 용은 스스로 떠났다. 이 상자는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고 상나라를 거쳐 주나라까지 보존되었다. 주나라의 역왕(歷王)이 상자를 열자 거품이 튀어나왔고 한 마리 도마뱀으로 변해 후궁쪽으로 도망을 갔다. 그 중 어린 시녀가 이를 만졌는데, 시녀가 성인이 된 후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 그 시녀는 놀라서 아이를 산에 버렸다. 
 
당시에 암암리에 유포되던 노래중에서 “상나무로 만든 활과 기나무로 만든 화살통이 주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가사가 있었다. 주나라 왕은 마침 활과 화살통을 파는 부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부부는 포국으로 도망을 쳤으며 길에서 버려져 있던 포사를 불쌍히 여겨 데려와 양녀로 삼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포나라에서 미녀를 주나라의 유왕에게 보냈는데 바로 포사였다. 유왕은 포사의 미색에 빠져 원래의 신(申)나라 출신의 왕비와 태자인 의구(宜臼)를 쫓아내고 포사를 왕비로 맞이하고 포사가 낳은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그럼에도 포사는 기뻐하거나 웃지 않았다. 왕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포사를 웃게하고 싶었으나 포사는 결코 웃지 않았다. 
 
하루는 유왕이 봉화대에서 봉화를 올리고 큰 북을 쳐서 적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 각지의 제후들을 불러모았다. 제후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지원을 나왔는데 적이 없자 모두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를 본 포사는 웃으며 즐거워했는데, 유왕은 포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이후에도 수차례나 거짓 봉화를 올렸다. 
 
많은 제후들은 왕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실망하면서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점점 응답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후 신나라의 왕은 쫓겨난 딸과 외손자의 일로 화를 내면서 서쪽의 견융(犬戎)과 힘을 합쳐 주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어떤 제후도 오지 않았으며 결국 유왕은 서쪽 유목부족인 견융에게 잡혀 처형당했고 포사는 포로로 끌려갔다. 
 
견융부족은 당시 중국의 섬서성과 감숙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훗날 북쪽으로 올라가 몽고초원에서 생활하였는데 춘추전국시기와 진나라 시기에도 항상 중원을 공포로 떨게 하던 유목민족의 하나가 되었다. 
 
천하를 논하던 주나라는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고, 태자였던 의구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겨 주나라의 명맥을 이어갔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의 평왕(平王)이다. 주나라 평왕 이전의 시기를 서주시기라고 하고 평왕 이후의 시기를 동주시기라고 한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이 비록 주나라의 전통은 인정했지만 유명무실한 세력으로 전락했다. 
 
천하의 중심은커녕 자신의 안위도 어려워진 주나라는 무시되었고 흩어져 있던 제후국들이 각자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무한 경쟁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바로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금도 다양한 세력들간에 경쟁하고 주도 세력이 없을 때 춘추전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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