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했던 춘추시기는 점차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해 명멸을 거듭하면서 살아남은 몇 개의 국가로 줄어들게 된다. 주나라 말기인 기원전 475년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반적으로 전국시기라고 일컫는다. 

 
아직 몇 개의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였으나 거의 영향력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 개의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살아남은 7개의 국가는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초(楚), 진(秦), 제(齊)나라이다. 이들은 전국시기가 시작된 후 또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를 통일하기 위해 국가의 힘을 기르고 권모술수를 사용하게 된다. 
 
전국시기란 이름은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란 사람이 편집한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역사서에서 유래했다. 이 책은 주나라에서 시작하여 이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전국시기의 7개의 나라에 대해 당시 사회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전국시기가 되면서 무기뿐만 아니라 농사에 있어서도 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수리시설과 경작기술이 발전하면서 농업이 발전하였고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사천성의 도강언이라고 하는 곳은 홍수과 가뭄을 예방할 수 있는 수리시설이 완성되었는데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사천성의 수도인 성도(成都)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넓은 곡창지대가 되었으며 훗날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경제적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국은 상업도 육성하기 시작했는데 각국은 자신들의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자신들의 도량형도 만들어 사용했다. 춘추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전국시대는 영토도 더 넓어지고 인구도 급격히 팽창하면서 그 경제규모가 확대되었다. 경제규모의 확대는 군대의 규모도 질과 양적으로 성장시켜 이전의 작은 전쟁이 아니라 대규모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춘추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던 사상들은 이제 마지막 통일을 위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사상과 학술 발전의 황금기라고 불렸으며, 진정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손빈병법, 귀곡자, 오기병법 등 전쟁과 관련한 저서들이 많이 등장했고 다양한 학파들이 집대성되던 시기였다. 
 
위의 7개 나라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가장 서쪽 지역에는 진나라 있었다. 영어로는 CHIN이라고 하는데 아마 여기서 China라는 말이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장 서쪽에 있어 서쪽 민족들과 제일 먼저 접하는 곳에 위치했고 중국의 많은 물산들이 이곳에 모여서 서쪽으로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쪽에는 제나라가 있었으며 산동반도 전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이 있는 곳에는 연나라가 있었고 하북지역을 다스렸다. 그래서 북경의 원래 이름이 연경(燕京)이었다. 청도에는 청도 맥주가 있듯이 북경지역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 이름이 연경맥주이다. 그리고 남쪽에는 초나라와 그 남쪽에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었다. 초나라와 오월은 원래 야만족의 땅으로 치부되었으나 춘추시기를 거치면서 중국 통일의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중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곳이었다. 그리고 조나라와 위나라, 한나라가 중원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춘추시기와 전국시기의 차이점은 특히 전쟁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춘추시기에는 상대방이 패배를 인정하면 그 영토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통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국시기는 패배자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인간의 가장 잔인한 면들이 보여지던 시기였다. 
 
중국의 역사는 춘추시기와 이 전국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최초의 중국통일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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