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냉혹한 이익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의 춘추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많은 국가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었고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그 중 대표적으로 힘을 가지고 지배적인 위치에 놓였던 나라들을 춘추오패라고 불렀다. 그 하나가 진(秦)나라였고, 진나라는 이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최초로 중국 통일왕조를 이루게 된다. 
 
원래 진나라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에 포함되지 않는 서쪽 변방의 아주 작은 국가였다. 그러다가 서쪽의 유목민족인 서융(西戎)이 주나라를 침략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진나라의 양공이 병사를 내어 주나라를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에 감사의 뜻으로 주나라의 유왕이 자신의 제후국으로 정하고 서쪽의 땅을 일부 내주어 중국 역사에서의 제후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서쪽 변방에서 거의 오랑캐 수준으로 여겨지던 진나라가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목공의 인재를 아끼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데 강태공이 있었다면 진목공에게는 백리해라는 신하가 있었다. 
 
백리해(百里奚)는 원래 우나라 사람이었다. 훗날 강태공이나 관중에 비길만한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초기에는 많은 현자들과 같이 어려움을 겪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서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궁핍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3년에 걸쳐 독서를 거듭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입신양명을 기대했다. 굳은 결심으로 집을 떠나 여러 나라들을 주유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고 또 직책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건숙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백리해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같이 생활을 하면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이후 백리해는 거의 노예가 되듯이 끌려가 말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목공은 진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때 공손지라는 신하가 백리해를 데려다 일을 시키면 진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후 염소가죽 5장으로 백리해를 진나라로 데리고 왔기 때문에 백리해는 염소가죽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백리해가 진나라의 목공을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살이었다. 
 
백리해의 도움을 받은 진나라는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하였다. 백리해는 자신이 가장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건숙을 진목왕에게 소개했고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진목왕이 건숙에게 치국의 도리를 물었다. 건숙은 군주의 도리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그는 군주가 덕만 있고 위엄이 없으면 나라를 다른 나라에게 빼앗기기 쉽다고 얘기했다. 동시에 군주가 위엄만 있고 덕이 없으면 백성들이 압제에 저항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다고 했다. 덕과 위엄의 균형은 지금의 리더들도 새겨들을 부분이다. 이어서 건숙은 지도자 개인은 욕심을 내지 말고, 분노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하며 조급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했다. 
 
진목왕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비록 서쪽의 작고 척박한 땅이었지만 패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진목왕이 중원의 전체에서 패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말년에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만에 빠졌기 때문에 그 기간이 오래갈 수 없었다. 
 
많은 지도자가 초기에는 잘하지만 말년에 가서 실패하는 경유가 바로 ‘자만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백리해와 건숙이 진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초는 만들었지만 천하를 통일할때까지 또 400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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