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商)나라의 왕들이 폭정을 일삼으면서 점차 인심을 잃어가고 있을 때이다. 당시 상나라의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던 주나라의 서백이 하루는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사냥을 가기전 점을 보았는데 점괘에 “이번 사냥에서 얻는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당신을 보좌할 인물이다”라고 나왔다. 

 
실제로 사냥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수라는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혼자 낚시를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그와 대화를 하는 중에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고 정중히 모시고 왕궁으로 돌아와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다. 이 노인의 본명은 강자아(姜子牙)였으나 서백의 할아버지인 태공(太公)때부터 기다리던 인물이라 해서 태공망(太公望)이라했고 민간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불렀다. 
 
강태공은 평택에서 카페리가 다니고 있는 산동성 일조(日照)출신의 바닷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나라의 왕을 만난 때가 72세였다. 이후 주무왕을 도와 후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주나라가 건국된 후 봉건제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강태공은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강태공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산동성의 치박이란 곳에 도읍을 정하고 제(齊)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강태공은 이후 중국의 유교, 법가, 종횡가, 병가 등의 시조로 불리기도 할 만큼 역사적으로 널리 추대되었고 한국에서도 ‘강태공의 낚시’란 말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강성했던 주나라도 점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봉건 제후들이 각자 살길을 도모하는 춘추전국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강태공의 12대손인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춘추시대의 5개의 강력한 패권제후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환공이전에 양공(襄公)때 국정이 혼란했는데 이때 관중(管仲)은 공자 규를 데리고 노나라로 피신하고 포숙아(鮑叔牙)는 공자 소백을 데리고 거국(莒国)으로 피신했다. 
 
훗날 제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소백이 귀국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나라는 관중을 시켜 활을 쏘아 소백을 죽이고자 하였다. 관중이 쏜 화살에 소백이 죽은 척하면서 몰래 도망쳐 귀국하여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노나라 왕은 놀라서 관중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의 친구였던 포숙아가 노나라 왕에게 편지를 써서 관중을 살려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환공을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관중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포숙아는 자신의 왕에게 “만약 왕이 제나라에 만족한다면 관중을 죽여도 되지만 천하를 제패하고 싶다면 관중이 없으면 안된다”고 건의했다. 
 
환공은 관중과 패왕의 방법에 대해 논하면서 크게 기뻐하여 관중을 대부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였고 점차 많은 제후국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했다.   
 
제나라 환공은 당시 많은 제후국들을 소집해 회의를 했는데, 이를 두고 회맹(會盟)이라고 한다. 그 회맹에서 제후국들은 주나라의 천자를 대신해서 환공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랐다.    
 
제나라가 춘추시기 많은 국가중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넓은 도량의 군주와 지혜로운 참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를 위해서 친구를 추천한 포숙아도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포숙아의 의리는 지금도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성어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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