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경험하는 지금, ‘뉴 노멀’(New Normal)이니 ‘언컨택트(Uncontact)’니 하는 말들이 관심을 끈다. ‘뉴 노멀’은 원래 경제용어인데, 경제의 변화 흐름에 따른 새로운 기준을 말한다. 경제학자들이 21세기가 과거의 고속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하고 이에 걸맞는 새로운
해마다 지키는 유대인의 주요 절기 가운데 ‘욤 키푸르’(Yom Kippur)가 있다. 보통 ‘대 속죄일’로 부른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는 중요한 날이다. 유대인들은 대 속죄일이 되면 회당에서 요나서를 낭독했다. 요나서를 들은 모든 회중들은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라고 고백 하였다. 왜 유대인들은 요나서를 낭독하고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과 품꾼에 대한 비유”가 있다.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러 이른 아침에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장터로 간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다. 아침 6시에 포도원 주인은 서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반적인 하루 품삯이었다. 그런데 포도원
필자의 어머니는 지난주에 암 수술을 받으셨다. 초기에 발견되어 그리 염려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나마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암 진단을 받고 몇 주간에 걸쳐 여러 가지 정밀진단을 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추가 검사와 의사와 수술일정 상의를 위해 필자는 어머니와 병원에 동행했다. 그리고 지난 주 수술은 잘 마쳤다. 어머니는 암이 의심된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선거관련 인쇄물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운전하다보면 선거운동원들이 여기저기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선거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어지럽게 달려있다. 후보들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지역을 책임지겠다는 야심찬 공약들을 담아 빌딩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매달았다.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선거일, 그런데 후보와 선거운동원들만의 선거철이
성경 복음서에 큰 부자에다 높은 관직까지 가진 한 청년 이야기가 있다(마태 19장, 마가 누가 18장). 그는 앞길이 보장된 성공한 젊은 지도자였다. 요즘말로 워너비(wannabe)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는 경건한 유대교인이었고 그동안 철저하게 종교생활을
화창한 봄이다. 하지만 2020년 봄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잔인했던 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영세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만 간다. 쉽사리 회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이 긴 전염병의 터널은 끝이 날까? 국회의원 총선거는 3주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전의 그 시끄러움이 없다. 가끔 길가에서 나누어주는 명함에도, “지금
요즘 라디오를 듣고 TV를 보아도, 인터넷을 검색해도 온통 코로나 이야기이다. 점점 피로감이 들 정도다. 전염병을 핑계로, 그리고 바빠서 여유가 없었다는 핑계로 통 책을 가까이하지 못했다. 요즘 많이 팔리는 책은 뭔가 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심리상담 관련 서적, 드라마로 제작된 원작 소설, 그리고 자기 계발 서적이 인기도서의 명단에 있다. 그런데 순간 “어
구약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 즉 사사시대가 있었다. ‘사사’는 히브리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부터 시작해서 왕정제도가 도입되기까지 과도기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던 직책이었다. 사사들은 평상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당면한 문제들을 판결하고 지도하였다. 비상시에는 군사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난세(亂世)에 등장하여 동족을 구원
성경 룻기 4장에는 ‘아무개’가 등장한다(룻기 4:1). 즉 이름이 소개되지 않은 어떤 사람이다. 어떤 성경번역본은 이것을 ‘여보시오’정도로 번역했지만, 개역개정성경처럼 ‘아무개’로 부르는 것이 보다 원문에 가깝다. 이름이 성경에 소개되지 않고 그저 ‘아무개’로 부르는 그 사람은 룻의 ‘기업 무를 자’였다. ‘기업무를 자’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규례로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선지자 가운데 엘리사가 있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 수넴마을에 사는 한 귀부인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 귀부인은 평소에 엘리사 선지자 일행을 돕고 극진히 대접했다.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통당하던 이 가정에 아이가 태어난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던 사랑하는 아들이 그런데 손써볼 틈도 없이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기적으로
봄날은 간다? 아니 꽃샘추위를 거쳐 몇 날을 더 지내야 겨우 시작될 봄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봄날은 간다니 뜬금없어 보일지 모른다. 오히려 새 봄을 기다리는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봄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는 사시사철 꽃피는 봄이라는 중국의 쿤밍을 그리워한 적이 있다. 삶의 근거지를 저 남녘땅 해남이나 제주도로 정하고 싶다는 소원을
봄을 기다린다. 따스한 햇볕을 기다린다. 고운 바람결을 기다린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남을 기다린다. 가볍고 밝은 옷차림에 새 봄의 활기찬 기운으로 힘차게 내딛으며 새 출발하는 발걸음들을 기다린다. 겨우내 묵혀지고 갇혀졌던 현실들, 답답한 정치와 경제 상황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니 뭐니 우리를 위축되게 만들었던 것들이 다 떠나가고 움츠린 가슴 활짝 펴고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번 사태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곳은 대부분 폐쇄되고, 심지어 확진자가 나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며칠 전 방송에서 하나님은 신자들보다도 가난한 자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어느 해방신학자의 인터뷰를 들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라면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마치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반대한다. 이번 기회에 성경이 말하는 부에 대한 관점을 창세기 13장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한 번쯤 어디서 들어보았음 직하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기독교인들도 선호하는 이 성경 구절은 개업이나 새로 무엇을 시작할 때 덕담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배경과 문맥과 상관없이 거두절미(去頭截尾)하
성경에서 야곱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버지를 속여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았고, 형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성공하여 크게 일가(一家)를 이루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형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 많은 선물로 화해의 몸짓을 형에게 보냈고 결국 화해를 이룬다. 무사히 고향땅을 향하던 그는
구약성경 룻기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던 ‘룻’이 어떻게 유대인 사회에 편입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는 어느 유대인 가정이 흉년을 피하여 이방인 민족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룻기 1장). 그런데 불행한 일들이 가정에 남편과 두 아들이 연거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과 두 아들 뒤에 남겨진 여인 ‘나오미’는 이방여인인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가 이 세상에 언젠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보통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해 낼만한 인물은 당연히 강한 용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메시야에 대해 말한다. 이 땅에 오게 될 구원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배척을 받고서도 대항하지 않는 매우 나약한 존재라는 것
성경 인물 가운데 참 가련한 여인 하나가 있다. 이름은 ‘레아’. 그의 여동생은 ‘라헬’이다. 성경은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소개한다(창세기 29:17).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한데 묶은 것 같다. ‘시력이 약한 레아’란 고운 눈매라는 해석도 있지만, 문맥상 ‘곱고 아름다운 라헬’과 대조적으로 박색(薄色) 즉, 아주 못생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