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야곱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버지를 속여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았고, 형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성공하여 크게 일가(一家)를 이루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형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 많은 선물로 화해의 몸짓을 형에게 보냈고 결국 화해를 이룬다. 무사히 고향땅을 향하던 그는 돌연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여정을 멈춘다. 화려하고 발달한  도시의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편안히 살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하나님과 한 약속을 스스로 저버린 행동이었다. 형을 피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그는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다 노숙을 해야 했던 ‘벧엘’에서 하나님께 맹세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여 무사하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면 자신은 평생 하나님만 믿고 섬길 것이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약속이었다(창 28:20-22).
 
그러나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그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힘든 시간 붙들었던 하나님보다 화려한 도시의 안전에 더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큰 화근을 불러왔다. 그 곳에서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창 34장). 그 도시 사람들은 이미 벌어진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은 속임수를 써서 그 지역 사람들을 복수의 칼을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결국 이 지역 주민들에 섞여서 편안히 살아 보려했던 야곱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집안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에 직면한다.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난 야곱에게 힘든 시절 그가 맹세했던 곳으로 돌아가 예배할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야곱은 결국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만난 후에야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 아무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의 발걸음을 내디딘 야곱의 일행은 안전하게 그 지방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오래된 약속을 이행하고 거기서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벧엘’이라는 지역의 이름은 ‘집’을 뜻하는 ‘베이트’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 만난 복합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힘든 시절 만났던 하나님을 다시 찾아 초심을 회복한다. 
 
야곱에게 벧엘은 많은 헛된 것들을 쫓아 살아왔던 사람이 다시 참 신앙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벧엘은 초심(初心)을 의미할 수 있다. 처음 순수했던 그 신앙을 회복한 것이다. 신자들에게 벧엘로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고향인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 전반으로 그 의미의 폭을 넓혀 순수한 열정과 미래를 향한 모험 그리고 희망을 가졌던 초심의 때를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지? 아스라이 잊고 살았던 그 초심의 때를 기억해 볼일이다. 초심을 잃은 마음은 왠지 추하다. 세상에 너무 찌들어서 양심도 남의 눈도 더 이상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국민을 힘들게 만드는 정치권과 검찰 등 권력을 가진 자들의 초심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아니 멀리 찾지 말고 나에게 초심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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