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이다. 하지만 2020년 봄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잔인했던 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영세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만 간다. 쉽사리 회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이 긴 전염병의 터널은 끝이 날까? 국회의원 총선거는 3주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전의 그 시끄러움이 없다. 가끔 길가에서 나누어주는 명함에도, “지금 어떤 시국인데 이런 게 다 뭐람” 하며 시큰둥하게 지나친다. 

 
지난 주일, 성도들은 가정예배로 드리기로 하고 목회자 가정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알아서 안 오는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예배드리러 오겠다는 사람들까지 사양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고생하는 공무원들의 노고에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 
 
주말 화창한 봄날 오후 가족들과 산책 삼아 소풍정원에 갔다. 주차할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느슨해진 코로나19 경각심’이라는 보도를 쏟아낸다. 하지만 어찌하랴! 방안에만 콕 박혀 있기에는 너무 답답한 것을. 그래도 대부분 마스크를 하고 나온 것을 보면서 봄날의 새로운 풍경이라는 생각과 함께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길가의 목련이 꽃을 피웠다. 기특하다. 인간군상들의 소동에도 자연은 운행을 계속한다.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는 노와의 대홍수 이후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세기 8:22). 사람들은 지금 신종 전염병을 두려워하지만, 성경은 언젠가 있을 인류의 멸망과 심판을 예고한다. 짧은 인생이든 긴 인생이든 언젠가는 결국 심판자 앞에 설 것이다. 그날까지 자연의 운행은 여전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루에도 신종 코로나가 아니어도 여러 질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전국에서 700여 명, 연간 27만 명의 사망자가 생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누구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 신라의 승려 월명사는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에서, “생사(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라고 탄식한다. 삶과 죽음은 그리 멀지 않다.
 
봄날과 죽음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봄은 생명이고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생동하는 봄 앞에서 죽음을 염려한다. 그래도 생명 앞에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음도 의미 있다. 그만큼 생명이 당연하지 않음을, 감사의 이유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새봄에 마음껏 봄날을 누리지 못함에도 희망을 품는 것은 살라고 주신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것도, 사니까 사는 것도 아닌, 다행히도 질병에 걸리지 않아서 사는 것이 아닌 풍성한 삶이길 소원해본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고 그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지금, 더욱 절실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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