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한 번쯤 어디서 들어보았음 직하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기독교인들도 선호하는 이 성경 구절은 개업이나 새로 무엇을 시작할 때 덕담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배경과 문맥과 상관없이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 말만 쏙 빼내어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말의 출처는 큰 불행을 당한 욥에게 욥의 친구가 한 말이다. 욥은 친구가 한 이 말에 수긍하면서도 큰 상처를 받았다. 말은 맞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욥의 친구는 욥이 당한 불행의 크기를 보니 욥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커다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지금 처한 형편은 좋아질 것이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욥이 당한 여러 불행이 그의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었음은 욥기 전체의 주제와도 맞닿아있다. 
 
억울한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정답만을 되뇌는 친구가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행을 당한 욥을 찾아와 그의 옆에 앉아서 같이 울어주고 조용히 침묵했던 처음의 시간이 욥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말은 맞는데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혁명 시절 국민이 외쳤다는 말, “빵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듣고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부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라고 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져 당시 국민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상대의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충고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렇다고 그저 모른 체 침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괜히 상처를 주거나 오해받을까 두려워 아무 말 안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삭막한 세상이 될 것이다. 
 
때때로 넓은 오지랖이 오히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도 한다. 다만 상대방의 형편과 사정을 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대방이 하는 말의 본심을 잘 파악할 필요도 있다. 상대방이 따끔한 지적과 충고를 바라는지, 아니면 다만 공감과 위로와 지지가 필요해서 하는 말인지도.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면서 하나님께 구한 유일한 소원이 ‘듣는 마음’(understanding mind)을 달라는 것이었다(왕상 3:9).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렵다. 
 
상대방을 올바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만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성경은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사람은 미련함 그 자체고 망신만 당한다고 했다(잠 18:13). 그리고 사람은 대답하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얻는데, 적절하게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에 대해 말씀한다(잠 15:23). 때에 맞게 적절한 말을 하는 사람이 참 부럽다. 
원래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말을 하기보다 먼저 듣는 연습을 하고,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하려 노력한다면 나아지지 않을까? 어차피 입을 닫고 살 수는 없는 인생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공감하면서 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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