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가 이 세상에 언젠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보통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해 낼만한 인물은 당연히 강한 용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메시야에 대해 말한다. 이 땅에 오게 될 구원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배척을 받고서도 대항하지 않는 매우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런 구원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선지자들이 전한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여호와의 팔’, 즉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가 사람들에게 혼란과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등장한 구원자의 모습은 아주 보잘 것 없고 연약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연한 순과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초봄에 추운 겨울을 딛고 나온 ‘연한 순’은 그야말로 연약하다. 오랫동안 가물어 비쩍 말라버린 땅에서 겨우 올라온 뿌리는 얼마나 힘겹고 연약한가? 구원자는 이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왔고,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권력자나 용맹스러운 용사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실망을 넘어서 멸시하기에 이른다. 초라한 구원자는 뭔가 세상 사람들을 혹할 만한 고운 모양이나 풍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구원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아기 예수는 마땅히 있을만한 곳을 찾지 못해 구유, 곧 짐승의 먹이통에 뉘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축하한 사람들은 밤새도록 남의 양떼를 지키며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했던 고단한 목자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던 이방인 동방박사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신랄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마 9:10-11, 11:9). 그리고 결국은 모진 십자가의 저주와 고난을 받아 죽음을 맛보기에 이르렀다. 
 
예수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하늘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 오로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날이 성탄절이다. 성탄은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요 기쁨이겠지만,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게 위해 비천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와야만 했던 슬픈 성탄절이기도 하다. 성탄절은 인간의 죄가 그만큼 뿌리 깊고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일같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성탄절은 그러기에 인류에게 희망이다. 이 땅에 친히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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