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가운데 참 가련한 여인 하나가 있다. 이름은 ‘레아’. 그의 여동생은 ‘라헬’이다. 성경은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소개한다(창세기 29:17).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한데 묶은 것 같다. ‘시력이 약한 레아’란 고운 눈매라는 해석도 있지만, 문맥상 ‘곱고 아름다운 라헬’과 대조적으로 박색(薄色) 즉, 아주 못생겼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요즘 흔한 말로 ‘눈이 썩는다’라거나, ‘안 본 눈 삽니다’라고나 할지. 

 
레아는 집안의 근심거리였을 것이다. 고대 근동의 결혼풍습은 신랑이 처가에 지참금을 주고 신부를 맞이하는 것인데, 과연 누가 지참금까지 주고 저렇게 못생긴 레아를 데려가겠는가? 이때 먼 곳에서 야곱이라는 사람이 온다. 야곱은 둘째인 라헬의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목축업자인 자매의 아버지는 오매불망 라헬을 연모하는 무일푼인 야곱을 지참금 핑계로 7년 동안 부려먹는다. 
 
약속한 7년이 되어 혼례를 치른다. 장인은 야곱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하고, 신혼 방에는 라헬 대신 큰딸 레아를 집어넣는다. 야곱이 아침에 깨어 보니 옆에는 못생긴 레아가 누워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격렬히 항의하는 야곱에게 장인은, “이 지방 풍속이 아우가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은 없다”라고 둘러댄다. 라헬에 눈이 먼 야곱은 다시 7년을 머슴처럼 일했고 졸지에 두 아내를 얻게 된다. (일부다처제는 당시 고대 근동의 흔한 풍습이었음을 고려하시라) 이렇게 동생에게 붙여 패키지로 시집가야 했던 레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 아내를 얻은 야곱은 오로지 라헬만을 사랑했다. 레아는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아들 출산에 목을 맨다.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동안, 레아는 계속해서 아들을 낳는데, 첫째 아들 이름을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이라고 짓는다. 마치 “여보, 내가 아들을 낳았어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둘째 아들 이름은 ‘시므온’(들으심)이다. 하나님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고백이다. 남편의 마음은 이번에도 요지부동. 셋째는 ‘레위’(연합)이다. “이쯤 되었으면 남편이 나와 연합하겠지”라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그것도 헛일이었다. 그러한 레아가 마지막 아들을 낳고 이름을 ‘유다’(찬송)로 짓고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한다.
 
레아는 끝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인정과 사랑에 한없이 목말랐던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찬송으로 바꾼다. 신앙인들은 진정한 위로가 오직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고백한다. 세상의 위로는 유통기한이 짧다. 
 
세상의 모든 기대와 인간적인 희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레아가 낳은 넷째 아들 유다. 그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는 길을 여는 조상이 된다. 지금도 이스라엘사람들은 유다인 혹은 유대인이라 불린다. 슬픔이 찬송으로 변한 유다의 자손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희망이 끊어졌어도 진정으로 의지할 이가 여기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크리스마스는 세상에서 버려지고 이제는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도 아직 희망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말 걸어오신 사건이다. 오늘도 우리 귀에 다정스럽게 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진정 기쁜 소식이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내게로 오신 사건이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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