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복음서에 큰 부자에다 높은 관직까지 가진 한 청년 이야기가 있다(마태 19장, 마가 누가 18장). 그는 앞길이 보장된 성공한 젊은 지도자였다. 요즘말로 워너비(wannabe)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는 경건한 유대교인이었고 그동안 철저하게 종교생활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묻는다. “선한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누가복음 18:18).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누가복음 18:19).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요, 그를 믿어야만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왜 나를 선하다고 표현하는가?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부자는 지금 무슨 일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지 묻고 있다. 즉 인간이 노력을 하고 어떤 경지에 이른다면 스스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질문이다. 청년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어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분이요,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조언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대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 선하거나 선하지 않거나로 평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청년과 같이 자기 나름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규정지을 때가 자주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좌파니 우파니 대립을 하고, 현 정부를 지지하느니, 지지하지 않느니 하는 갈등과 다툼이 있다. 상대방의 의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고 내 주장이 맞다고 확신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관계가 서먹해지고 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 교회 지도자들까지 끼어들어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신앙인들이라고 해서 정치에 무관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 정치를 쓰고 그것을 종교로 읽는다. 세상의 문제들을 진리의 문제로 비약시킨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처럼 착각하고 정치적 행동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지도자들조차 만나면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그렇게 흥분을 하고, 입장이 다르면 분개하면서도, 정작 복음이 공격을 받는 상황에 대해서 그만큼 분노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있음을 잊지 말일이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진리로 믿지만, 사실은 자기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우리 서로가 상대를 용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언제나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판단과 가치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의 의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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