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아무도 선호하지 않았던 직업. 그러나 경제발전과 더불어 이제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젊은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공무원(公務員)’이다. 예로부터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구었던 조상들은 과거에 급제해서 높은 직위의 관직을 가지길 희망했었다.
하지만 70년대 급속한 산업발전과 함께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 박봉(?)의 직업 등 배우자 인기직업 순위에서도 항상 하위권에 머물렀다.
시대가 변했다. 고용없는 성장, 불확실한 미래 등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공직사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공무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면 ‘안정적인 직업. 노후가 보장된 직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에 종사하는 사람. 넓은 의미의 공무원은 행정부분만 아니라 입법부, 사법부에 종사하는 자까지 포괄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 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또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해 놓았다.
일정한 급여를 보장해주고 계급에 따라 봉급도 달라지며 가족들과 자녀들을 위한 복리후생 등 각종 혜택도 주어진다. 매우 달콤하고 매력적인 부분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망각한 부분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점.
지난 8월 3일 평택시에서는 신임 공무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하나같이 평택시민을 위한 봉사자로의 각오가 남달랐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재흥(55세)씨.
장마비가 쏟아지던 지난 24일 오후에 팽성읍에서 근무중인 이재흥 씨를 만났다.

군대에서 시작된 남다른 지역 ‘평택’

부산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던 이 씬느 영어에 소질이 있었다. 당시 영어학원은 매우 드물었던 시절로 영어를 잘했던 이씨는 학교에서도 영어성적이 우수한 편이었다.
해가 지나 대학교 3학년 무렵. 이 씨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평택에 있는 K-6(캠프 험프리스)에서 군 복무를 하게됐다. 카투사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미군기지 주변 평택시민들의 삶을 보았던 이 씨에게는 주민들에 대한 애뜻한 감정이 싹텄다. 이후 동두천 미 2사단에서 군복무를 계속했으며 평택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졸업이후 서울의 럭키금성 통신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던 이 씨는 평소 예의바른 품성으로 주변 지인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 이 씨에게 찾아온 기회. 이웃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됐다.
“군대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다가 아내를 만났습니다. 평택은 저랑 인연이 깊은 곳인거 같네요. 아내 고향이 평택(송탄)이었거든요.”
처갓집을 방문할 때마다 평택에 정을 붙였던 이재흥 씨. 한 때는 기업에서 열심히 근무하며 프로젝트 팀에서 근무도 햇지만 IMF와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며 많은 상처가 생겼다.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젊어서부터 열심히 근무했던 기업에서 쓸모가 다한 사람처럼 내팽겨지는 순간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달면 삼키고 씀녀 뱉는다’는 표현이 참 적절하더라구요.”
그후 이 씨는 지인들의 새로운 신규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지만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기업에 대한 원망감이 있었을까요. 스트레스는 쌓이고 제 자신을 속이는 거 같아서 일에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한동안 방황의 시기를 겪은 후 하나뿐인 딸을 위해 2010년 6월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뭔가 저의 흔적을 남기고 싶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노력한 피와 땀의 흔적이 남는 일을 꿈꿨죠.”
“결국 공무원이 되고자 저와 비슷하게(?) 사춘기를 겪고 있던 딸아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공무원 시험 준비해서 공무원에 합격하고 딸 아이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합격하기로요.”
약속은 공무원에 합격한 이 씨가 먼저 지켰다. 신한고 3학년에 재학중인 딸은 수능이 끝나야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무원 시험준비였지만 이 씨는 오로지 목표를 위해 정진햇다. 2011년 한차례 낙방을 하며 쓴 잔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2012년 행정직 9급에 당당히 합격했다.
“국어가 약했거든요. 다른 과목들은 외우다 보니 어느정도 실력이 쌓였는데… 솔직히 국어 맞춤법은 지금도 어렵습니다.(웃음)”

“경험을 살려 평택시에 봉사하겠습니다”

“평택에서 군 복무할 당시에 느꼈던 주민들의 애환을 덜어주기 위해 팽성읍에서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이 씨는 8월 3일 임명장을 교부받고 현재 팽성읍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직사회에 발을 들인 이 씨의 첫 담당업무는 팽성읍의 개발팀 업무.
옥외광고물 관리, 불법광고물 관리, 재난 관리 등 개발을 비롯한 모든 현안을 처리하고 있다.
“행정학을 배우면서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는데 지방자치는 종합행정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더라구요. 전문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봉사자로서 모든 민원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60세 정년까지는 7년. 짧을수도, 길수도 있는 기간동안 민원이 발생하면 ‘첨병(尖兵)’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겠다고 이 씨는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고 바라는 마음이 강하면 꿈도 이뤄질 수 있다잖습니까. 제 꿈은 평택시가 살기 좋은 도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살기 좋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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