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나이가 좀 높은 세대들은 광복을 8.15 해방으로 더 많이 기억될 것이다.

  이 민족이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36년간의 식민 생활의 압제에서 벗어난 날이기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 광복의 날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단지 하나의 역사로서 배워 알고 있을 뿐, 광복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야 체험한 선배 세대들보다 덜 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조선일보 칼럼에서 보니 미디어리서치가 서울과 6 대 광역시의 대학생 신입생에게 “올해가 광복 몇 주년이 되는 해 인지 알고 있나”라고 물어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44%가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한다.

  한편,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가 65주년이다.

  3년여에 걸친 치열한 동족 간의 전쟁에서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만 남긴 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끝난 지도 7월 27일이면 62주년이 된다.

  어찌 보면 광복도 중요하지만, 처절했던 전쟁을 일시적으로나마 종전시킨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비록 영구적인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이었지만 공산화가 되지 않고 분단된 상태로라도 우리의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게 된 것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북한 공산군이 대구와 부산 그리고 경상도 일부 지역만 남긴 채 이외에 우리 남한 전 지역이 점령당하는 위기에 있을 때 미국을 위시한 16개 국의 유엔군이 참전함으로 우리 국군과 함께 북진을 하여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과 백두산 바로 앞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맞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오산 부근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과 소련 간에 휴전 논의가 시작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당시 필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아침에 등교하면 수업은 뒤로하고 전교생이 휴전 결사반대의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민과 각 단체와 함께 하는 궐기대회에 참석하고 연일 거리 시위에 나섰다.

  한편, 유엔군을 총지휘하던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참전을 중시하며 만주에 핵무기 공격을 주장하다가 투르만 대통령에게 해임되어 환국하여 국민들로부터 전쟁영웅으로 최고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연설을 통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와 북진통일 주장도, 전 국민의 휴전 결사반대의 궐기에도 불구하고 1953년 7월 23일 개성 근교의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의 조인이 이뤄지고 말았다.

  당시 협정 문서에 조인은 유엔군 수석대표로 미 육군 해리슨 중장과 조선 인민군 수석대표로 남일 대장이 했고 이날 오후 문산 유엔가지 내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인 미 육군 클라크 대장이 확인 서명하였고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다음날 개성에서 중국 인민지원 군 수석대표로 팽덕회가 확인 서명하였다.

  이로써 정전협정 조인 절차가 모두 끝나고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성이 멈췄다.

  우리는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으며 휴전에 책임은 유엔과 미국이 저야 하기에 이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만주의 폭격은 곧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투르만 대통령의 전격적인 맥아더 사령관의 해임과 우리가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휴전협정이 이뤄진 것은 통일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버린 것으로 지금도 한으로 남는다.

  지금 달력을 보면 8월 15일은 ‘광복절’로, 6월 25일은 ‘6.25 전쟁일’로,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로 쓰여 있을 뿐, 휴전협정의 기록은 없다.

  8월 15 일 광복절과 6월 25일 6.25전 쟁일과 함께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뤄진 7월 27일 휴전 협정일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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