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시즌입니다. 먹을 것이 지금 처럼 풍성하지 않던 시절에 졸업식은 자장면 먹는 날이었습니다. 31년 전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서정리에는 무진장이라는 자장면집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었던 탕수육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해마다 졸업식이면 으레 많은 사람들이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졸업식’ 하면 ‘자장면’입니다. 이번 주에 딸아이가 중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졸업식 마치고 우리 가족은 삼겹살을 먹었습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에 뭔가 허전했습니다. 자장면을 먹어야 졸업식이 끝난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 모여서 다시 자장면을 먹기로 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특별한 음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 동짓 날에는 팥죽, 단오날에는 수리떡을 먹습니다. 생일날에는 미역국을 먹고, 시험을 앞두고는 찹살떡이나 엿을 먹습니다. 영화를 볼 때는 팝콘과 콜라가 제격이고 주말저녁 TV 앞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치킨 한 마리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일(사건)과 음식은 때로는 매우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얽힘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아주 분명합니다. 더 우선적인 것은 일입니다. 물론 설이라고 해서 전부 떡국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떡국을 먹는다고 전부 설인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일이면 미역국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미역국을 먹는다고 당연히 생일은 아닌 까닭입니다. 팝콘과 치킨, 그리고 콜라가 주는 기쁨은 얼마든지 다른 주전부리로 대신할 수 있지만 영화가 주는 기쁨과 감동, 그리고 가족간의 화목한 저녁한 때는 팝콘, 치킨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일보다 음식을 우선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사람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음식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이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나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인공과 아내가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 공원에서 심하게 다투는 장면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절한 장면이 이어지는데 갑자기 애국가가 나옵니다. 오후 5시가 된 것입니다. 주인공은 갑자기 눈물을 훔치고 일어나서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습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또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 웃었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심부름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면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멈춰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했습니다. 나랏님들 생각으로는 그래야만 애국심이 생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라사랑은 국민의 의무입니다. 특별한 때에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경의도 표해야 하고 애국가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매일 오후 다섯 시에 하던 일을 멈추게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다고 해서 없던 애국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미역국을 천 그릇 만 그릇 먹는다고 생일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천번 만번 국기에 대한 맹세를 기계적으로 읊어도 저절로 나라사랑의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어떤 기초위에 세워졌는지를 먼저 생각 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 낸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어설 때, 그 일이 감동도 되고 눈물도 되는 것입니다.

  늘 자기가 먹던 음식을 먹어야만 일을 마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졸업식 끝나고 비싼 삼겹살 먹고 나서 ‘자장면을 먹어야 끝난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장면을 먹든 삼겹살을 먹든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만약 아직도 졸업식이 끝나지 않았다고 우기려면, 조용히 혼자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먹으면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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