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매계약서를 작성할 때 매도인 ○○○(이하 ‘갑’이라 한다)와 매수인 ○○○(이하 ‘을’이라 한다)를 계약서 서두에 밝힌다. 그다음에 조항 별로 계약의 목적, 매매 금액, 매매 금액의 지급 조건 및 방법, 소유권 이전, 계약 위약시의 위약금 지급, 기타 특기사항 등을 명시하고 갑·을 간의 서명 날인한다.

  이렇게 쌍방 간에 매매의 의사가 일치하고 따라서 유불리 간의 이해 관계나 사후의 모든 조치가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원만히 합의한 것이다. 여기에서 갑·을 간에 아무런 차등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갑과 을 이라는 순위의 표시는 있지만 그것은 일일이 매도인○○○, 매수인 ○○○라고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편이적인 표시일 뿐, 다른 아무런 의미는 없다. 그대로 평등 계약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갑의 행패니 갑질 이니 하여 갑은 상위에 있는 자요, 을은 하위에 있는 자로서 갑은 막강한 권위와 위세를 을에게 행하여 을은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굴복을 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한항공의 부사장이 승무원과 사무장에게 한 땅콩갑질, 또 백화점의 주차장에서 모녀가 주차안 내원에게 무릎을 꿇린 갑질, 대전의 한 백화점에서 고객인 한 여인이 남자 직원에게 욕설과 뺨까지 때린 갑질, 부산경찰청장이 부하인 총경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부은 갑질, 이런 일련의 사례들이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지난 왕조시대에서나 있었던 양반 상민의 계급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 같다. 가진자와 못 가진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상류층과 하류층,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등의식 은 바로 도덕성 부재에서 오는 동물적 행동이 바로 갑의 행패로 나타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갑질을 당하는 입장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를 보고 듣는 많은 선량한 국민들의 마음 속에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런 신분상의 차등, 직업의 귀천을 불식시키고자 지난 시대의 천시되었던 직업의 호칭도 공식적으로 많이 바꾸지 않았던가, 환경미화원, 관리원, 상담원, 홍보원, 간호사, 운전기사, 미용사, 이용사, 영양사, 공인중개사, 기능사 등의 호칭은 좋은 예이다. 옛날에 나이 지긋한 천민인 백정이 장터에서 푸줏간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 첫 번째 양반이 말했다. “야, 이놈아! 고기 한 근 다오”, “예, 그러지요” 그 백정은 대답하고 고기를 베어주었다.

  두 번째 양반은 상대가 비록 천한 백정이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거북했다. 그래서 점잖게 부탁했다. “이보시게, 선생. 여기 고기 한근 주시게 나”, “예, 그러지요, 고맙습니다” 그 백정은 기분 좋게 대답하면서 고기를 듬뿍 잘라주었다. 첫 번째 고기를 산 양반이 옆에서 보니, 같은 한 근인데도 자기한테 건네준 고기보다 갑절은 더 많아 보였다. 그 양반은 몹시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따졌다. “야,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왜 이 사람 것은 이렇게 많고, 내 것은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그 백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그거야 손님 고기는 ‘놈’이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선생’이 자른 것이니까요”라고 응대 했다. 어느 사회든 조직 구성원 간에 직급의 상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급 간의 업무상의 한계일 뿐, 인격이나 인권의 차등은 아닌 것이다. 각기 직급에 따른 도덕성과 품위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갑이나 을은 질서를 위한 단순한 위치일 뿐 상하, 강약, 주종의 위치가 아님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굴종을 강요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갑질’, 이제는 높은 도덕심과 겸손으로 고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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