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 되어야 램프들은 진가를 발휘한다. 식구들 눈치 안 보고 집안 곳곳에서 등장한다. 바람에 약 한 촛불 대신 등피 밖으로 불빛을 뿜는 자가발전을 하며 전깃불 환한 세상, 마음도 환하냐고 묻는다. 등유를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됫병에 사 들고 집에 돌아오면 조심조심 등피부터 닦아야 했던 유년이 환하다.

그을음이 불꽃의 땀 이라고 여겼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램프는 동화책 속 세상을 읽게 하고 어린 배고픔을 잊게 했다. 반딧불이와 별자리가 주변에 지천이었으니 소복입은 무서운 이야기가 달빛 아래 공동묘지를 배회하지 않았던가. 달걀귀신이 있다고 믿는 또래들을 뒷간에서도 비춰주던 램프 불빛, 어느새 ‘터의 무늬’라는 말이 ‘터무니없다’라는 관용구가 되어 국어사전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 워한다.

등갓에 ‘대한등(大韓燈)’이라는 상표가 있고 유리 등피에 ‘USA’ 라는 영문 표시가 또렷한 램프야 말로 두 개의 국적을 갖고 있는 셈 이다. 우리 기술로 등피마저 만들 수 없던 그 시절의 궁핍을 증언하 고 있다. 동족상잔의 폐허 위에서 너나없이 일구어야 했던 희망, ‘알라딘 램프’가 있는 나라로 돈 벌러 가자고 속삭였던 것처럼, 젊은 날 의 땀방울을 고국의 집 한 채로 뚝 딱 바꾸어 준 것이다. 그 나라에서 바벨탑 유적을 마주했을 때의 설렘, 에덴공원에서 아브라함 묘비를 만났을 때의 감동은 가슴에 늘 뜨겁다.

부질없는 욕망이 솟구칠 때마다 지평선을 따라 이동하던 양떼를 기억하게 한다. 램프들이 먼 유정(油井)에 심지 를 담그고 있듯 호호 입김 불어 마 음의 등피를 닦으면 우정과 사랑도 환해지는 건 아닌지. 눈에 띌 적마다 하나 둘 모아왔으니 모양 과 크기가 모두 다르고 각각의 노래를 갖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내달리던 포장마차 이야기가 언 뜻언뜻 들춰지기도 하고, 불꽃이 커 보이는 크리스털 램프에선 어느 간이역의 증기기관차 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신호용으로도 쓰였던 것이리라. 몇몇 지인들은 취미가 촌스럽다 고 놀리지만 그때마다 램프가 명 실상부한 타임머신이라고 웃어주 는 것은 내 몫의 애정이다. 내게 도 굳이 아호가 필요하다면 사람 들의 하루하루가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는 ‘램프’가 제격이라고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린다.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해주듯 주어진 등유만큼 불꽃을 내주는 절제력, 언제쯤 숲 속 오두막에서 함께 시간의 무늬를 짜며 밤마다 노래할 수 있을까.

축복처럼 바람이 흐르는 숲에서 옷소매 걷어붙여 장작을 패고, 활활 지핀 난롯가에 초대할 것은 바로 나여야 하리라. 세월이 너무 환 해 돌보지 못한 나, 잊었던 별자리 를 다시 그리는 동안 반짝거리며 돌아올 반딧불이들, 오만한 네온 대신 램프들이 마중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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