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홍슈취안은 성경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발췌하여 편집한《권세양언》을 통해 기독교를 파악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 교리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했다. 또한, 그의 환몽 경험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유도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홍슈취안은 자신이 상제의 명을 받아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상제 신앙으로 개종하여 구원할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 중국 사회의 현실과 밀접하게 맞아떨어졌다. 중국 사회는 불평등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특히 아편중독이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퍼져 있어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사회가 극도로 타락한 상황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편전쟁은 상제가 영국을 도구로 사용하여 타락한 청나라를 징벌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홍슈취안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 즉 유교, 도교, 불교 등을 우상숭배와 이단으로 보고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상제신앙만이 중국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의 독특한 신앙관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포교 활동은 다양한 저술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처음에는 주로 빈농과 일용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점차 반정부 반란 세력도 그의 포교활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전후로 중국 사회에는 민중의 반란이 자주 발생했다. 1836년 후난성 남부에서는 백련교도 란정준(藍正樽)이 반란을 일으켰고, 1847년에는 후난성과 광시성 경계 지역에서 백련교도와 천지회가 연합해 라이짜이하오(賴再浩)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1849년에는 라이짜이하오의 잔여 세력을 이끈 리위안파(李沅發)가 후난성, 광시성, 구이저우성(貴州省) 일대를 휩쓸었다. 

이런 반란 세력들은 청나라 지배계급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지만, 강력한 지도력이나 명확한 정치적 목표가 부족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약했다. 반면, 홍슈취안이 이끈 배상제회는 강력한 리더십, 명확한 정치 목표, 강력한 무장 조직,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회원 수가 급증하며 세력을 점차 확대할 수 있었다.

배상제회는 기독교 율법에 준하는 엄격한 도덕적 생활을 실천했다. 상제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효도를 다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살인, 간음, 도적질은 금지되었고 아편 흡음과 음주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종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한 윤리적 생활과 경제적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생활 덕분에 신도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850년에는 1만 명에 이르렀다.

배상제회가 유교, 도교, 불교 등을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활동은 지역 토착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청나라의 군사 체계는 만주족의 정규군인 ‘팔기군(八旗軍)’, 한족으로 구성된 ‘녹영군(綠營軍)’과 지방의 민병 조직인 ‘단련(團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배상제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단련과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홍슈취안은 1850년 7월, 회원들에게 가산을 매각하고 광시성의 구이핑현(桂平縣) 진텐촌(金田村)에 모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어 홍슈취안의 탄생일로 알려진 1851년 1월 11일(음력 12월 10일)에는 진텐촌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선포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