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 받으심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이 있는데 보통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부른다. 

가상칠언의 첫 번째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이 가리킨 저들은 주위에 있던 구경꾼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에 연루된 로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몰랐다.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기 원하셨고, 이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다(행 2:23, 41). 

두 번째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다(눅23:43). 이것은 옆에 매달려 있던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양편에 매달린 두 명의 죄수는 한동안 모두 예수님을 비웃었지만 그중 한 명은 마음을 바꿨다. 묵묵히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무죄함을 확신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일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또 다른 증거였다. 폭도는 예수님이 진정한 왕임을 고백하고, 그분이 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낙원의 허락을 받았다. 구원은 진실로 은혜에 의한 것이다. 심지어 생명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비를 구할 때 사죄와 영생을 얻지 못할 만큼 악하고 절망적인 사람은 없다.

세 번째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이다(요 19:26-27). 예수님은 자기 모친의 안녕을 염려하여 그녀를 보호할 길을 모색하셨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모친을 부탁했다. 비록 메시야의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에 관계된 모친을 마지막까지 염려하셨다.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로 부르신다. ‘여사님’과 같이 여성을 높여 부르는 용어지만 모자지간의 호칭은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단지 마리아의 아들로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주로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의 말씀이다(막 15:34).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후(막 15:33)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진 순간이다. 이때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삼위로 하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취급하셔서 철저한 단절과 버리심을 당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위로도 없이 십자가에서 버려지셨다.

다섯 번째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요 19:28).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 전부터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으며, 심한 채찍질 당하여 살점이 뜯겨 나갔다. 갖은 폭행을 당한 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에 오르셨고,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 육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셨다.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요 19:30).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이 완성된 것을 아셨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을 완수하신 것이다. 이 말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은혜에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이 틀렸음을 강력하게 증거한다.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보탤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주제넘은 생각이다. 구속은 단번에 영원히 완성되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였다(눅 23:46).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있는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구원을 이렇게 완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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