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중국 사회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가지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먼저, 경제 기반이 농업인 사회에서 대다수의 토지가 소수의 지주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땅을 가지지 못한 농민인 소작인의 증가를 의미한다. 소작인은 지주의 땅을 빌려 삶을 영위해야 하므로, 소작인의 증가는 소작인 간의 과열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쟁에서 뒤처진 소작인은 쉽게 사회의 반항 세력으로 변할 수 있다.

인구의 증가에 따른 경작지의 정체 현상도 문제를 가중시킨 한 요인이 되었다.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친 130여 년간의 태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평성대 시기에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18세기 중반 청나라의 인구는 1억 8천만 명이었으나, 100년 후에는 4억 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에 반해, 경작면적은 확대되지 않고 거의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전역에 퍼졌고, 은으로 아편값을 지불하면서 은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민은 동전으로 물건값을 지불했는데, 은 가치의 폭등으로 인해 동전의 가치가 대폭 떨어졌다. 국가의 세금을 은으로만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폭등한 은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동전이 필요했는데, 이는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아편전쟁 패배에 따른 배상금 지불은 또다시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의 길로 나서거나 반정부 세력에 합류하였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난징조약이 체결되고, 조약에 따라 5개 항구를 통상 항구로 개방하게 되자, 무역의 중심이 광저우에서 다른 개항 도시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은 상하이(上海)였다. 이는 광저우 경제와 사회에 큰 악재로 작용하였다.

아편전쟁 이전부터 유일한 통상 항구로서의 역할을 했던 광저우는 이미 광저우에서 내지로 이어지는 상업과 무역 루트를 형성하고 있었고, 경작지를 얻지 못한 농민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이 무역 루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역 중심이 다른 항구로 옮겨가면서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 루트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고, 이와 관련된 다수의 운송업자와 노동자는 실업자가 되었다.

자연재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연재해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므로 인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해결 과정에서 인재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아편전쟁 이후 통치 능력이 쇠퇴한 청나라에서는 더욱 그랬다.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는 홍수, 가뭄 그리고 병충해로 인한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곡물 가격이 대폭 상승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곡물을 소유한 부호나 지주들은 곡물을 비싼 가격에 팔려고 하고, 중앙정부는 수수방관하며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지역의 유지들이 소량의 곡물을 대여해 주기는 했지만, 그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에 따른 이자는 너무 비싸서 빈민들은 상환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세력들의 반란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1851년에 발생한 태평천국 운동(1851-1864)도 그중 하나였지만, 중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다른 반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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