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아편전쟁 결과 체결된 난징조약(1842년)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열강의 중국 진출 상황은 식민지적 지배와 개입을 심화시켰다. 

난징조약의 체결로 영국은 숙원이던 거점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홍콩이 영국의 중국 내 무역 거점인 동시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아편전쟁을 통해서 영국의 화력을 경험한 청나라에게 홍콩에 상시 주둔하는 영국군은 위협 그 자체였다. 

영국은 이러한 무력적 배경을 등에 업은 채 광저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새롭게 개항된 5개 항구에서 합법적인 무역과 동시에 불법적인 거래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청 정부는 서구 열강 앞에서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군의 만행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광저우를 중심으로 영국배척운동(排英運動)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영국배척운동의 기원은 아편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삼원리민중항쟁(三元里民衆抗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은 1841년 5월 영국군이 삼원리에 침략하여 한 중국 여인을 능욕하자 민중들이 영국군을 살해함으로써 발생하였다. 

103개 향촌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농민, 수공업자, 어민 등 하층 군중으로 구성된 향토군과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다수가 패퇴하고 일부가 고립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청 관리의 설득으로 향토군이 철수하면서 일단락된 사건이다. 

이 항쟁이 민중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껏 관군이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영국군을 민중이 격퇴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삼원리민중항쟁은 외세 배척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난징조약 체결 이후 중국 민중의 외세 배척운동은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주로 영국 군인과 상인이 정복자로서 행세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약자를 능멸했기 때문이다.

1842년 12월에는 광저우에서 영국상관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물건을 사고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영국군인이 대금 지불을 요구하는 상인을 칼로 찌른 후 영국 상관으로 도피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군중이 상관으로 몰려가 항의하자 영국군이 총을 발포하였고 이에 분노한 군중이 영국 상관에 불을 지른 것이다.

1846년 7월에는 영국 상인이 중국 상인을 폭행하고 영국 상관에 감금하자 주변의 상인들이 몰려가서 항의했는데 영국 상인들이 이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여 3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847년 12월에는 광저우의 근교에 있는 황죽기(黃竹岐)라는 마을에서 촌민 1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는 중상을 입힌 영국인 청년 6명이 촌민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46~1847년에는 영국인에게 땅을 임대하지 않는 ‘반조지투쟁(反租地鬪爭)’이 발생하였다. 

후먼조약에 의하면 5개 항구에서 건물이나 토지를 빌릴 때는 소유주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영국인들은 소유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단으로 빌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영국인 배척운동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것은 영국인이 광저우 성내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운동이었다. 난징조약에 의하면 영국인은 새로 개항한 5개 항구에서 거주할 권리가 있었는데 중국 민중이 영국인의 광저우 입성(入城)을 격렬하게 반대하여 무산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영국인 배척 운동이 발생할 때마다 청 정부는 영국인에 유리하도록 처리하여 백성들의 공분을 샀다. 중국 백성에게 청 정부는 더이상 신뢰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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