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그 결과 영국의 승리로 1842년에 불평등한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난징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보완하기 위해 영국은 1843년 7월에 ‘5구통상장정(五口通商章程)’과 같은 해 10월에 ‘후먼조약(虎門條約)’의 체결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영국은 관세율을 5%로 고정시키는데 성공했고, 영사재판권과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다른 나라에게 새로운 특혜를 부여할 때는 즉각 동일한 특혜를 받는다)를 얻어냈으며, 외국인이 개항지에서 자유롭게 건축할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난징조약의 체결은 청나라가 전통적으로 유지해 오던 ‘조공체제(朝貢體制)’가 붕괴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청나라와 다른 국가와의 관계가 ‘조공’ 관계에서 ‘조약’ 관계로 대체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중화사상에 빠져 주변국을 상하로 보던 관계가 동등한 주권 국가의 관계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며, 봉건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수 천 년을 유지해 오던 봉건체제가 단숨에 자본주의체제로 대체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봉건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속성이 서서히 발전해 가는 형편이었다. 청나라는 의도하지 않은 ‘반봉건(半封建)’ 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영국이 청나라와 조약 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열강들도 청나라에 영국과 동일한 조건의 조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에서 서구의 화력을 경험한 청나라로서는 열강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844년 10월에 미국과 ‘왕샤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였고, 프랑스와는 ‘황푸조약(黃埔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왕샤조약과 황푸조약의 내용은 대체로 난징조약에서 체결된 내용을 구체화하거나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는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닌데 청나라가 미국과 프랑스와 불평등한 조약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청나라는 영국에게 했던 것과 동일하게 미국과 프랑스에 관세자주권과 영사재판권 그리고 최혜국대우권을 넘겨준 것이다. 

서구 열강과 청나라의 불평등한 관계의 확대는 이후 자연스럽게 더 많은 열강을 끌어들이게 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난징조약 체결 이후 많은 서구 열강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중국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국토가 너무나 커서 나라 전체가 어느 특정 국가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각 열강이 차지한 곳은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두고 ‘반식민지(半殖民地)’라고 표현한 것이다.

난징조약 체결로 열강은 자신들이 바라고 바라던 광저우 이외의 지역에서 자유롭게 교역할 권리를 얻었지만, 중국은 전쟁 전에 만연했던 사회문제 즉 아편문제와 은값의 폭등 문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난징조약에서 아편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의해 실질적으로는 아편밀수를 용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난징조약 체결 이후에 아편의 유입량이 증대된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은값도 지속적으로 올라 물가인상을 가져왔고 이로써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중국의 특정 지역에서 거주할 권리를 얻은 열강은 자신의 종교인 천주교와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근대 중국사회의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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