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이면 가족들이 샤워 후에 사택 화장실에 있는 순간온수기의 온도 조절 레버를 저온으로 내려놓는다. 교회의 전체 전기 계약 용량이 작아서 온풍기에 방송시스템까지 쓰다 보면 혹시 주일 예배 중에 전기 과부하가 걸리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월요일 아침 일찍 서울로 출근하기 위해 샤워기를 튼 순간 아차 싶었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주일 아침에 늘 마지막으로 샤워하는 아들 녀석이 레버를 낮춰놓았다는 것을 깜박했다. 

전날 밤에는 미지근한 물이 조금 남아 있었고, 간단히 씻고 자느라 미처 의식을 못 했다. 결국 온도 조절 레버를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한 나머지 이른 아침 바쁜 시간에 겨우 차가움이 가신 물로 씻고 급하게 나와야 했다. 

온도계는 현재 온도를 정확히 나타내 준다. 하지만 온도를 표시해 주는 기능을 할 뿐 온도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온도 조절계는 어떠한가? 온도를 변화시킨다. 온도계가 추운 방 안의 온도가 몇 도인지 알려준다면 온도 조절계는 그 방을 따뜻하게 해준다.    

물론 조절계 자체가 방안을 따뜻하게는 못할지라도 그 조절계에 연결된 온열 기구를 통해 내가 원하는 대로 온도를 조절할 수가 있다.

사람 중에는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 조절계와 같은 사람이 있다. 온도계 같은 사람은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해 준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뭐가 문제인지를 잘 지적해 낸다. 그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지저분해”라고 지적만 하는 수많은 사람보다 그곳을 깨끗이 치우는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비판 능력은 뛰어난데, 그래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데, 그것을 올바로 바꿀 능력은 없다. 

대안이 없는 비판이란 아프기만 할 뿐이다. 공동체에 이런 사람들만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문제 해결은 되지 않은 채 그 공동체는 결국 오래 가지 못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방송 매체들이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성금 모금을 할 때가 있다. 이를 위한 특별 생방송을 하기도 한다. 기부를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혹은 큰 금액을 기부한 이들의 명단과 액수가 방송에 나오면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착한 일을 한다고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다른 사람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기부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정말 누군가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려는 위선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잘 구분해 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려움 당한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지적질을 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실력이 아니라, 나는 그들과 달리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실력이다.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위선적으로라도 남을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안도현 시인의 잘 알려진 시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남을 비판하고 허물을 들추기는 의외로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허물을 덮어주고 그 사람이 그 허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는 참 어렵다. 

말로만 안 되고 큰 노력이 필요하고, 더구나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남의 약점과 결함을 잘 찾아내는 자신의 비판 능력에 감탄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상황을 더 좋게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갈 것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게 진짜 실력이다. 

나는 온도계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온도 조절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더 삭막하게 만드는 쪽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세우고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쪽인가? 당신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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