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온 글이 많은 사람의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 사연이 있다.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이글을 최근 우연히 보았다. 

글의 내용은 이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두 번 우연히 본 적이 있을 뿐 연락조차 안 하고 지내던 친구가 자기 결혼식에 와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아주 간곡하고 끈질기게 부탁을 해와서 마지못해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신부 측 하객 수에 비해 신랑 측 하객 수가 너무 적었다. 결혼식 후 친구가 너무나 고맙다고 보내온 장문의 카톡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날 참석한 하객 중 신랑의 가족과 친지들을 빼고 나머지 몇 명은 하객 아르바이트였고, 진짜 친구라 할만한 사람은 글쓴이를 포함에 두 명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두고 두고 결혼식에 참석해 준 친구를 고마워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후에 왕래가 잦아지면서 더 끈끈한 친구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지난 토요일 신학대학원 동기인 목사 두 명의 자녀 결혼식이 각각 있었다. 시간은 달랐지만 안성에서 서울에 갔다가 다시 천안으로 가서 두 결혼 예식에 참석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신학대학원 동기인 아내에게 다녀오라고 부탁하고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루두루 친구 간이었다. 두 목사 다 나와 동갑내기에다 나름대로는 친하다고 할만했지만, 어차피 둘 다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다음날 교회의 중요한 행사 준비와 또 다른 여러 일정을 핑계 삼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아내와 함께 두 곳 모두 다녀왔다. 결혼식에 갔을 때 친구 목사들의 반가워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품앗이란 말이 있다. 공동체에서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서로 간에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을 말한다. 세상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하게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천애고아’(天涯孤兒)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보살핌과 배려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을 주고, 또 빚을 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빚진 마음이 있다면 건강한 가정이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자식은 부모의 수고와 사랑을 감사하며 빚진 마음을 가진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다는 ‘give-and-take’의 거래관계라 해도 쌍방이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대할 때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채무자의 태도와 채권자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채권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채권자의 의식을 가지면 피해의식이 생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긴다. 만일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부모가 자녀 때문에 자기가 희생한다는 의식이 강해지고, 자녀 또한 부모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요구사항만 커져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부간에도 자칫 서로가 요구사항만 많아지고 서로가 빚을 주었다는 채권자의 마음을 가진다면 더욱 다툼과 갈등이 커지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은혜 의식이 사라지고 공로 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은 점점 형식적이 되고 생기를 잃게 된다. 

신앙을 포함한 모든 삶에서 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이 모두 당연한 것이거나, 혹은 다 내 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마음, 빚진 마음이 깃들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결코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홀로 살아서도 안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고 또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누구와 연결되고 서로 사랑과 관심의 빚을 주고받을 것인가? 자신을 고독한 섬으로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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