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린쩌쉬는 도광제의 전적인 신임을 얻고 아편에 대한 엄금 정책을 강력하게 실행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흡음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중점을 두었고, 대외적으로는 외국 상인이 소지하고 있는 아편 전량 제출과 이후에도 아편을 중국에 들여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 제출을 요구하였다.

1839년 3월에 부임한 린쩌쉬는 흡음자에 대해 철저한 단속을 실시한 결과, 같은 해 12월에 아편 흡음으로 감옥에 수감된 자가 2천 명 이상에 달했고, 이 중에서 하루에 3~4명이 아편의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박종우
박종우

아편을 팔다 적발된 판매자는 이관(夷館, 외국인 상관) 앞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다.

영국의 중국무역 수석 감독관인 찰스 엘리어트(C. Eliot, 1801~1875)도 린쩌쉬의 강력한 단속에 못 이겨 소지하고 있던 아편을 제출하였다.

그 양이 2만 상자에 달했다. 린쩌쉬는 이렇게 몰수한 아편을 호문(虎門)에서 3주에 걸쳐 전량 소각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아편은 제출했지만 서약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서약서는 “이후 청나라에 입항하는 선박은 영원히 아편을 가지고 오지 않으며, 만일 아편을 가져와서 적발될 경우 아편은 청 정부가 몰수하고 해당자는 즉각 처형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어트는 끝까지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소지한 아편이 몰수당한 것에 대한 항의 차원으로 광저우에서 빠져나와 홍콩섬과 까우룽(九龍) 반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기간 중 1839년 7월 7일에 까우룽 반도의 침사추이(尖沙咀) 촌에서 술에 취한 영국 선원들이 사원을 파괴하고 지역민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농민 임유희(林維喜)를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임유희 살해사건’이다.

린쩌쉬는 영국 측에 범인 인도를 요구하였지만 엘리어트는 이에 대해서도 거부하였다. 영국인은 영국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린쩌쉬는 중국어로 번역된 《만국공법(萬國公法, Law of nations)》을 통해서 영국인도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어트는 린쩌쉬가 요구한 범인 인도와 서약서 제출 두 가지를 모두 거부했으며, 청나라의 일방적인 조치에 대한 대항으로 광저우에서 퇴각하여 마카오로 이주해 갔다. 당시 마카오는 청나라의 지방관인 동지(同知)와 포르투갈이 파견한 총독이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린쩌쉬는 마카오로 옮겨 간 영국인에게 식료품의 공급을 금지시켰고, 영국 상인들이 고용한 중국인들을 대륙으로 퇴거시켜 버렸다. 

1839년 8월 24일에 포르투갈의 마카오 총독은 영국 엘리어트에게 마카오에서 더이상 영국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통고를 하였고 영국은 마카오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인에게는 거주할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른 고통을 마카오의 지방관인 동지에게 호소했으나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았다.

“해상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은 그대들이 저지른 불법의 결과이다. 아편을 팔지 않겠다는 서약서만 제출하면 광저우에는 언제나 자유롭게 상륙할 수 있다.”

이후 영국의 엘리어트는 이러한 난국을 전환하기 위해 전쟁을 구상하는데 그 첫걸음은 국회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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