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1838년 9월, 린쩌쉬는 다시 도광제에게 아편이 매우 해로우므로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며, 아편 수입이 군대의 붕괴와 재정의 고갈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한 도광제는 마침내 엄금론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도광제는 1838년 12월 31일 린쩌쉬를 흠차대신(欽差大臣, 황제의 칙명을 받은 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을 조사하고 금지하기 위해 광저우로 파견하였다. 

린쩌쉬가 광저우에 도착한 1839년 3월 10일은 아편 밀수에 대한 반감이 심하고 아편 흡음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높았던 시기였다.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린쩌쉬가 광저우에 도착한 후,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 총독 덩팅전(鄧廷楨)과 광동 수군 제독 관텐페이(關天培) 등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① 해안 방어를 적극적으로 정비하여 외국의 침략을 막는다.

 ② 아편상을 엄격히 체포하고 불법을 행하는 관리를 처벌한다.

 ③ 국민의 아편 판매 및 흡음을 엄격히 금지하고, 아편 흡음자는 즉시 아편과 흡음 도구를 반납하고 기한 내에 금연해야 한다.

 ④ 외국 아편상은 기한 내에 모든 아편을 제출해야 한다.

린쩌쉬의 강력한 조치로 영국 아편상들은 2만여 상자의 아편을 강제로 넘겨주었고, 린쩌쉬의 감독하에, 1839년 6월 3일부터 6월 25일까지 모든 압수된 아편을 호문(虎門) 해변에서 소각했다. 

아편 소각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많은 관리와 지역 주민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아편은 단순히 불에 태워 소각하게 되면 아편의 찌꺼기가 땅에 침투되어서, 후에 흙을 파내서 재생하면 20~30%의 아편을 재생할 수 있다. 

이를 잘 인지하고 있던 린쩌쉬는 단순한 소각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아편을 처리하였다. 

린쩌쉬는 호문 해변에 둘레가 50미터 되는 두 개의 인공 구덩이를 파도록 했다. 그다음 아편이 흙에 흡수되지 않도록 밑바닥에는 돌을 깔고 벽면에는 나무판자를 둘렀다. 

구덩이의 바다쪽에 소각된 아편을 내보낼 수문을 만들었고, 그 반대쪽에 수로를 만들어 아편을 소각할 물을 댈 수 있도록 하였다. 

바닷물은 염도가 낮아 아편을 제대로 소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수로로 대량의 물을 투입하고 엄청난 양의 소금을 투입하여 염분의 농도가 짙은 소금물을 만들었다. 

그런 후에 몰수한 아편 덩어리를 네 조각으로 잘라 구덩이에 던져놓고 한참 동안을 기다린 후에 소석회(燒石灰)를 투입하면 구덩이 안은 연기를 뿜으며 끓어오른다.

구덩이 안이 연기로 끓어오르면, 구덩이를 가로질러 설치된 나무 널빤지 위에서 인부들이 긴 막대기로 소금물과 석회에 섞여 있는 아편을 휘젓기 시작한다. 휘저을수록 연기가 크게 피어올랐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태우는’것처럼 보였다. 충분히 희석시킨 후 수문을 열어 바다로 내 보내면 일정 양의 아편 소각이 일단락 되었다. 소각 기간만 1839년 6월 3일부터 시작하여 약 3주간 지속되었고, 이때 소각된 아편이 약 2만 상자(1상자는 60kg, 총 1,200톤)로 엄청난 양이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정의의 실현이었지만, 영국 당국과 상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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