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9일. 같은 날 교우 중 한 분은 생명의 위기를 넘기고 퇴원했고, 다른 한 분은 세상을 떠났다. K집사님과 L집사님이었다. 한 날에 생사가 엇갈렸다. 

그날 퇴원하게 된 K집사님이 처음 병원에 내원했을 때 피 검사를 했는데, 결과를 본 의사는 칼륨 수치가 정상 수치보다 너무 낮아서 당장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고 경고했다. 심장이 멈출 수도 있으니 곧바로 응급실로 가서 약을 투여하고 링거를 맞으라고 했다. 급하게 여러 검사를 진행하면서, 입원 절차를 밟는 과정 중에도 의료진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칼륨이 비정상적으로 낮으며 언제 심장이 멈출지 알 수 없다고. 자녀들이 모두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데다가 부인 권사님도 약하셔서 내가 모든 절차를 함께 하였다.

입원 후 며칠이 지나고 의사에게 연락이 왔다. 계속 약을 투여하는데도 수치가 정상으로 오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른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일주일 만에 칼륨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통원 치료를 하기로 하고, 결국 입원 10일 만에 퇴원하게 된 것이다.

반면 L집사님은 그날 세상을 떠났다. 침대에서 떨어져 고관절 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에 들어간 지 두 달만이었다. 처음 수술을 마치고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교우들과 병문안을 갔을 때는 수술 후 얼마 되지 않아 거동은 불편했지만 의식은 뚜렷했고 의사소통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반가워하는 그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5일 전에 만난 L집사님은 의식만 있고 겨우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의사소통은커녕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점차 생명의 기운이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12월 24일 같은 날 두 사람을 찾았을 때, 한 분은 우려와 달리 칼륨이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고, 또 한 분은 생명이 식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난 29일, K집사님의 퇴원을 돕고, 그동안 미루었던 일 처리를 위해 함께 이동하던 중 L집사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 밤에 L집사님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지병이 있으신데다가 오랫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해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L집사님의 아들과의 통화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사전에 링거를 맞추든, 다른 병원으로 옮기시든 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너무 늦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마치 어차피 돌아가실 것을 기다린 것처럼 말이다. 

돌아가신 다음 날 성도들과 장례식장을 찾았다. 장례 예배를 드렸다. 설교하는 동안 마음은 많이 차분해졌다. 전날 허망함과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그분은 사시는 동안 그리 평안하지 못했고 병약했다. 이제 이 세상의 수고를 다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성경은 이렇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보통 사는 것이 복이지만 죽는 것은 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생사관은 다르다. 그것이 신앙 안에서 되어진 것이면 사는 것도 복이고 죽는 것도 복이다. 이 세상 수고를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도 복이고, 아직 이 땅에서 수고할 일이 있어서 살게 해주신다면 그것도 복인 것이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하다. 왜 누구는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아직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일까?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할 일만은 아니다. 성경은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믿음을 따라 죽는 것도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히 11:13). 성도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는다. 내가 살아있음이 더욱 의미와 가치를 가진 오늘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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