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청 정부의 아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방무역상인으로부터 중국으로 밀수되는 아편의 유입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사회와 경제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광둥체제 시기에 외국 상인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銀)으로 거래해야 했다. 아편이 유입되기 전에는 중국이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이 대폭 증가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에 경제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편의 밀수가 증가하면서 무역의 역조현상이 일어났고, 중국에 유입된 은은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중국에서 은의 유출량은 1820년대 초에는 매년 약 수백만 냥, 1820년대 중반부터 1830년대 초반까지는 매년 약 1,800만 냥, 1830년대 중반에는 약 2,000만 냥, 1830년대 중후반부터는 약 3,000만 냥에 달했다. 은 3,000만 냥은 당시 청나라가 1년 동안 지정은(地丁銀) 세금으로 거두는 액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지정은은 ‘지세(地稅)’와 ‘정은(丁銀)’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지세는 농지에 부과된 세금으로 땅의 크기와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는데, 이는 농민들이 생산한 곡물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형태였다. 정은은 인구에 기반한 세금으로, 성인 남성 한 명당 일정 금액을 부과하는 형태였는데, 이는 가구의 남성 수에 따라 세금이 달라졌다.

대량의 은 유출로 중국 사회에서 은의 가치는 대폭 상승했고, 상대적으로 동전의 가치는 떨어졌는데 이른바 ‘은귀전천(銀貴錢賤)’ 현상이다. 

아편이 유통되기 이전 시기에는 은 1냥은 동전 1,000문(文)에 해당했다. 당시 서민의 한 끼 식비가 10~20문 정도였다. 아편이 확산되기 이전에는 은 1냥에 동전 1,000문이던 비율이 아편의 밀수와 유통이 증가하면서 은값이 올라 은 1냥이 1,300문, 1836년에는 1,500문, 1838년에는 1,600문에 달했다. 대량의 아편 수입과 그에 따른 은의 유출로 발생한 은귀전천 현상은 중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가져왔다.

은귀전천 현상은 사회 각 방면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수확한 농작물을 팔아서 은을 얻고, 그 은으로 세금을 납부했는데, 은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농민들은 동일한 양의 세금을 내기 위해 더 많은 농작물을 팔아야 했다. 이는 농민 계층에게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주었고, 빈곤과 불만을 증가시켰으며, 사회의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도시 지역과 상인 계층 또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은귀전천 현상으로 인한 일반 대중의 구매력 감소는 시장의 수요를 축소시켰고, 이는 상인 계층의 수익 감소로 이어졌으며, 많은 사업체들이 위축되거나 폐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제무역에서도 은의 가치 상승은 중국 상인과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서양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게 만들었다.

이렇듯, 은귀전천 현상은 19세기 중국 사회와 경제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불안,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긴장이 증폭되는 배경이 되었으며, 아울러 아편에 대한 새로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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