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린 만뢰산을 올랐다. 자연 생태적 경관과 역사적 사건으로 다양한 등산로가 있는 해발895m 천안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명산이다. 임진왜란 때 중요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만뢰산을 오르기 전 보탑사와 고려시대 건립된 비인 유적 연곡리 석비가 문화와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인위적으로 결빙을 녹인 마을길과 도로는 눈의 흔적이 사라지고 잠시 주춤한 틈에 나무의 눈도 모두 햇살에 녹고 있었다. 미끄러운 오르막이 진행되는 산길이라 아주 천천히 고요한 풍경을 차창으로 바라보는 일도 신비롭다. 길이 깊어지면서 눈은 더 많이 쌓이고 차와 인적 드문 하얀 눈꽃세상이 펼쳐졌다. 눈의 나라, 눈의 왕국, 눈의 여왕, 엘사가 떠오르는 흰빛 세상에 검은 나무와 갈색 덤불이 드문드문 보이거나 겹겹 백설기처럼 누운 흰 눈이 응달의 겨울 산을 바람과 지배하고 있었다.

이곳 산짐승들은 어디에 숨어 겨울을 나는 것일까 궁금해지고 걱정이 되었다. 저 높이 쌓인 눈을 파내어 숨기고 아껴둔 도토리와 알밤을 얻어 생존하는 것일까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 생명이 정지한듯한 차에 만뢰산에서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해거름의 잔가지에 작은 딱새가 꽁지깃을 털고 있었다. 생명의 명랑하고 활발한 모습에 눈물이 나려했다. 순간 존엄이란 말이 떠오르며 순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산은 혹독한 상황에도 생명을 버리지 않고 저리 따뜻이 품어 키우는 구나, 산을 든든히 믿으며 살아가는 새들이 찌든 영혼을 꺾어 주었다.

단체의 모임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늦은 밤길이었다. 동네의 상가도 일찌감치 문을 닫은 고요한 시간 골목 안은 추위로 얼어붙었다. 허리가 반쯤 접힌 8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낮은 수레에 얼마 되지 않는 얄팍한 파지 몇 장을 얹고 기다시피 하며 걸어오셨다. 스치며 중얼중얼 거리는 주문 같은 말을 풀어보니 “아유, 추워라. 손 시려워라.”며 마음을 후볐다. 가득 올려도 천원도 되지 않을 작은 수레를 보며 만원을 드리면서 “할머니 어서 집에 가요, 이렇게 추운 날은 나오지 마세요.”라고 하니 할머니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류시화 시인의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이란 시가 있다. 시인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의 말들이니 다를 것이다. 겨울 산 죽음의 시간과 같은 곳에서 딱새를 만나는 놀라운 기쁨은 시의 여러 구절을 생각하게 하고 저무는 한해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간 하루의 재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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