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1713년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무역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을 밀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당시에도 아편무역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청 정부는 1729년(옹정 7년)에 개인이 아편을 마시거나 피우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러한 흡음 장소의 개설도 금지시켰다. 1796년(가경 1년)에는 외국 아편의 유입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아편 자체를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밀수조직과 부패한 청나라 관리의 결탁으로 아편 유입량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박정우 교수
박정우 교수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 광둥에서 행하는 무역형태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회사 자체의 무역이고, 다른 하나는 동인도회사 직원이 배의 일부를 빌려 자신의 화물이나 위탁받은 화물을 싣고 교역하는 사무역(私貿易, Private Trade)이며, 나머지 하나는 동인도회사와 관련 없는 일반상인이 동인도회사의 허가를 받아 광둥에 와서 독립된 무역을 하는 지방무역(Country Trade)이다. 중국 현지인들은 ‘컨트리(Country)’의 영어 발음을 따서 ‘항각상인(港脚商人)’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 지방무역상인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아편밀수무역에 관여하였다.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고 제조한 후 판매하는 전 과정에서 동인도회사가 전매권을 독점하고 감독하였지만 청나라의 아편금지령으로 인해 지방무역상인을 통해서 밀수의 형태로 불법적인 무역을 했다.

청나라로 밀수되는 아편의 양은 해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1800년에 약 4,100상자(1상자는 600kg)가 유입되었고, 20년 후인 1820년에는 7,500 상자, 1830년에는 2만여 상자가 유입되었다.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39년에는 4만 상자에 달했다.

아편 유입의 증가는 아편흡음자의 증가를 의미한다. 아편흡음의 확대는 지역적으로는 초기에 해당하는 1720~1730년 시기에 광둥과 푸젠의 해안지방에서 시작하여 급속도로 내륙으로 확대되었는데, 1839년 아편전쟁 발발 전에는 랴오닝성 선양(瀋陽)까지 확산되었다.

아편을 피우는 계층도 처음에는 상류계층과 부유한 상인층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베이징의 황족과 환관 같은 권력자들에게도 확산되었고,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등 빈곤 계층도 입을 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사회활동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승려와 부녀자들도 아편에 중독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아편에 중독된 자는 약 200만 명에 달했다.

일반 백성 사이에서 아편중독자가 확산되는 것도 심각한 사회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의 문무관료와 병사들까지도 아편을 흡음하게 되고 중독되어 가는 점이었다. 이는 국가 안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아편밀수는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아편흡음자의 증가로 무역의 역조현상이 일어났다. 영국과의 무역에서 항상 흑자를 기록했던 청 정부가 아편밀수로 무역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아편밀수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문제의 근원인 아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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