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13년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산업자본가와 자유무역상인은 동인도회사가 중국 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공정함을 호소했고, 자유로운 무역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대중 무역적자 해결과 통상항구 확대를 위해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영국은 세 번에 걸쳐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첫 번째는 1793년(건륭 58년) 조지 매카트니(G. Macartney)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강화하고, 영국 상품에 대한 시장 확보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전권대사 매카트니는 1792년 9월 26일에 영국을 출발하여 청나라 조정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서 광둥에 정박하지 않고 발해만에 위치한 따구커우(大沽口, 현재 텐진天津에 속함)로 항해하여 1793년 음력 8월에 도착했다.

음력 8월 13일은 건륭제의 생일이고, 1793년은 때마침 80세여서 황제의 팔순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황제는 열하(熱河)의 행궁인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었다. 청나라 황제들은 수도인 베이징의 여름 더위를 피해서 5월에 피서산장에 와서 국가업무를 보고 10월쯤에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건륭제의 생일에 맞춰 축하사절단의 성격으로 황제를 알현했다. 처음부터 동등한 교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는 첫 만남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나라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으로 여기는 중화사상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중국 중심주의적 태도는 사절단 대표인 매카트니에게 황제에게 갖추어야 하는 ‘삼궤구고(三跪九叩, 한 번 무릎 꿇고 세 번 머리를 숙이는 것을 세 번 반복하여 상대방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인사 방식)’의 예(禮)를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절단 입장에서는 삼궤구고의 예를 취하면 영국이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영국식 예로 타협을 보았다. 건륭제의 아량으로 사절단의 황제 알현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중심주의적 태도는 영국과의 무역 협상에서도 드러났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황제인 건륭제를 만나기 위해 여러 가지 서양의 기술과 선물을 가지고 갔지만, 건륭제의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다.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 생산품은 필요하지 않다”라는 표현에 나타나듯이 영국이 가져온 물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영국은 무역관계 개선 외에도 중국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다음과 같은 협정을 맺기를 희망하였다. 첫째, 영국은 전권대사를 베이징에 상주시키기를 희망하며, 마찬가지로 중국이 런던에 대사를 파견하기 원한다면, 영국 왕실은 최상의 예의로 그를 대우할 것이다. 둘째, 영국에게 저우산(舟山)과 텐진에서의 무역을 허용하고, 마카오의 예를 따라 저우산 근처에 영국 상인이 거주하고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섬을 제공한다. 셋째, 마카오에 주둔하는 영국 상인들이 광저우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넷째, 영국 상품이 중국 하천에서 운송할 때 면세 또는 감세 혜택을 받으며, 중국에 일관되고 투명한 관세 표준이 있기를 바란다.

치외법권 보장, 안정적인 무역을 위한 조약 체결, 광저우 일구통상의 폐단 근절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첫 사절단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카트니 일행은 중국의 남해안부터 발해만을 따라 북상하면서 중국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었고, 열하에서 대운하를 이용해 귀국하는 과정에서 중국 내륙지방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청나라는 “가라앉는 거대한 군함”이었다. 

1816년(가경 21년) 암허스트(W. P. Amherst)를 대표로 하는 두 번째 사절단이 파견되었지만 삼궤구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황제인 가경제를 알현하지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1834년(도광 14년)에는 세 번째 사절단인 네피어(W. J. Napier)가 파견되어 입항 허가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교섭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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