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고난을 겪고 있던 욥은 지금까지 의롭게 살려고 했던 자기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큰 재난이 닥친 원인이 자기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내뱉은 욥의 말들은 역으로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처럼 되어버렸다. 

자기가 옳다고 계속 주장하다보니 결국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로운 것처럼 된 것이다. 욥은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간다고 한들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의롭게 살았음에도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면 범죄하는 삶보다 나을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 욥의 항변이다(욥 35;3). 

이런 말을 그동안 잠잠히 듣고만 있었던 엘리후는 욥을 책망한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고 한다(욥 35:5). 

인생이란 기껏해야 저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구름조차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아니냐는 것이다. 

하물며 저 하늘보다 높이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욥이 착하든, 악하든 그것이 무슨 유익이라도 줄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 35:5-8).  

우리가 착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그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고 교만이다.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움이나 악행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알량한 의를 내세워 하나님이 내리신 고난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의 죄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나 영향을 주고, 또 욥의 의로운 삶도 사람에게나 유익한 것이지 하나님에게 하등 도움이나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때로 우리가 나름 착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한다. 

반대로 악행을 일삼는 사람이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뭐 하는지 몰라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라고 한다. 

이런 말에는 우리의 착함과 악함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나 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자리잡고 있다. 엘리후는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지혜자 엘리후는 그리고 사람들이 학대를 받으면 부르짖으며 벗어나려고 애원하는 현실을 지적한다(욥 35:9). 억압이 심해지면 부르짖고, 세력이 있는 자들이 억누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청하면서 울부짖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그저 본능적으로 고난이 오면 소리를 지르고 어떻게든지 고난을 피해보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한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욥 35:10).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밤중에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찾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 밤 같은 고난의 시간이 와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노래를 주신다고 엘리후는 말한다. 그런데 억울한 학대 속에서 본능적으로 외마디를 지르며 부르짖을 뿐이지 환난과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짐승보다 낫도록 가르치시고, 공중의 새보다 지혜롭게 만드셨다. 

그저 본능대로 반응하고 본능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인생을 관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욥 35:11).

하나님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이 사무치는 밤중에 노래를 주셔서 이기는 힘과 희망을 주시는 분이다. 인생이 칠흑같이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때 필요한 것은 어두운 때에도 희망을 주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분은 인생의 밤에도 희망의 노래를 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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