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일구통상’ 즉 ‘광둥체제(Canton System)’는 주로 중국이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85년 동안 외국 상인들이 광저우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시행한 정책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광저우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일구통상 정책이 실시되었다. 첫 번째는 명나라 시기인 1523년부터 1566년까지 43년 동안, 두 번째는 청나라 초기인 1655년부터 1684년까지 29년 동안, 세 번째는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5년 동안 이루어졌다.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광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영국은 무역적자와 거주문제에 있어서 불만이 많았다. 광둥체제 하에서 청나라와 무역을 하기 원하는 다른 나라의 무역상들은 다음과 같은 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첫째, 외국인(外夷)은 부인을 광저우로 데려오면 안 된다.

둘째, 외국인은 이관(夷館, 외국인 상관商館)에 한정하여 거주하며 함부로 외출해서는 안 된다.(단, 8, 18, 28일의 3일간에 한하여 근처 정해진 장소에서만 산책을 허락하나 한 번에 1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외국인은 광저우에서 겨울을 나서는 안 된다.

이 외에도 외국인은 무기를 휴대해서도 안되고, 중국어를 배우거나 중국 서적을 구입해서도 안되며, 심지어 가마를 타는 것도 금지되었다.

유럽 선박들은 5, 6월 남서풍이 불 때 광저우로 와서 장사를 하고 ‘겨울을 나서는 안 된다’는 조항 때문에 10월 북서풍이 불 때 돌아가야 했다. 광저우에 머무르는 4~5개월 동안 위와 같은 규정에 제한되어 거주하는 것은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광저우에서 유럽까지는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해야 하는 대항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선박들은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마카오에서 머물다가 다음 해 남서풍이 불면 다시 광저우로 들어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포르투갈 상인은 명나라 때 해적을 토벌해 주는 댓가로 매년 명 정부에 약간의 땅값만 지불하고 1553년부터 마카오에 거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시작해서 청나라 시기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같은 지리적 이권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광둥체제 하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중국 무역은 적자였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영국산 모직물은 따뜻한 광둥에서는 매력적이지 못했고, 동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와 같은 상품들은 예전과는 달리 중국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청나라와의 무역은 은으로만 결제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는 은의 대량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동인도회사의 무역적자는 곧 영국의 무역적자를 의미한다. 동인도회사는 날로 심해지는 무역적자로 인해 영국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동인도회사에 속하지 않은 자유무역상인들은 대중국 무역적자의 원인을 동인도회사의 독점권때문이라고 공격하였다.

동인도회사는 무역적자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18세기 말부터 아편을 밀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1729년(옹정 7년)부터 아편을 판매하거나 흡음장소의 개설을 금령(禁令)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수의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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