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욥기는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를 묻는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난 기가막힌 불행을 당한 욥에게 친구들은 말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

친구들은, 죄 없는 사람은 절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 말씀대로만 산다면 복을 받고 살아간다는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즉, 욥에게 세 친구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것이다. “세상 모든 일들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따른다네. 자네에게 이런 큰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자네에게 큰 죄가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욥은 이러한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완전한 사람이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재난을 당해야 할 만큼 큰 죄를 짓지도 않았어” 욥은 자기가 당한 일들은 자기가 행한 일들에 비해 너무 불공평한 것이며 그래서 너무 억울하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욥에게도 욥의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녹아있다. 욥은 죄가 없는 자기에게 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욥의 이 말 속에는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의인은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니 자기가 당한 이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는 인과율, 인과응보 사상이 욥에게도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인이 없는 곳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가장 분명한 예가 바로 성탄의 은혜,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선을 행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한 그 크신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에베소서에서도 이렇게 증언한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내가 심은 원인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나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성경 말씀을 통해 이해시키고 설득해 가신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며,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항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 일도 처음부터 오직 은혜로운 손길에 의한 것이었다. 욥이 잘해서 하나님이 그를 꼭 부유하게 해주셔야 할 의무가 없었다. 동일하게 욥이 고난을 받게 하실 때도 그가 꼭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섭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기독교는 이 땅의 것을 열심히 구하고 이 땅의 것으로 풍성하게 보상받아 장수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비록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없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로 빚어져 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옳다’는 고백으로 살아간다.

성탄절은 내가 아직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래서 그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도 구원의 은혜가 임한 날이다. 죄가 없으심에도, 이유 없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겨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 성탄절이다. 이 사랑을 깨달아 안 사람은 이 땅에 뜻을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극진하신 사랑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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